[소설]오래된 정원(45)

  • 입력 1999년 2월 21일 19시 40분


기집애 뭘 잘했다구 우니. 북쪽 사람은 우리 동포가 아닌 줄 아니. 상은 무슨 놈에 상이야.

나는 아버지의 술주정이 너무도 속 상하고 창피해서 우리 방에 들어가 이불을 싸매고 엎드려서 울기만 했죠. 어머니가 돌아와 정희에게서 그 얘길 들었나봐요. 헌데 보통 때 같았으면 취한 아버지에게 한바탕 해댔을 엄마가 다른 날 보다 더욱 조용해요. 나는 그런 엄마가 야속했지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의 지난 날에 대해서 조금씩 눈치를 채게 되었어요. 엄마가 실타래를 풀 듯이 한 가지씩 나에게 들려 주었거든요. 나는 아버지가 전쟁 때에 고생을 하셨고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구만 알고 있었지만 그래두 ‘우리 편’인줄만 알고 있었거든요. 아,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도 흉칙하고 무서운 빨치산이었다니.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애물단지였던 거예요.

고 삼 때였을 거예요.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있지요. 어머니는 그 무렵에야 시장에 점포도 마련했고 작은 한옥 한채도 장만해서 우리 남매들도 안정된 가정 생활을 하고픈 때였기도 해요.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끝낸 후 집으로 오지않고 연이어 화실에서의 실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대개는 저녁 아홉 시가 넘어 있었죠. 어머니는 열 한시가 되어야 가게 정리를 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나와 정희가 먼저 오는 순서대로 저녁을 짓곤 했어요. 내가 화실에 가는날에는 으레 정희가 저녁 장만을 했는데 그날따라 걔도 늦었는지 라면으로 때웠다구 해요. 나는 너무 배가 고팠지만 늦게 오실 엄마나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위해서 저녁을 지으려고 했지요. 마당에서 쌀을 일고 있는데 아버지가 대문으로 들어섰어요. 아버지는 그날도 술에 만취해서 발도 잘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요.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아버지를 보니까 슬픔과 짜증과 분노가 한꺼번에 치솟아 오르더군요. 나는 수도가에 쭈그리고 앉은채로 아버지를 노려 보았죠.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내 앞에 멈추어 섰어요.

지금이 어느 땐데 저녁을 인제사 짓는 게야. 말만한 년들이 둘씩이나 있으면서 동생들 밥을 굶겨?

아마도 아버지가 그냥 나를 지나쳐 당신 방으로 들어가 보통 날처럼 다리를 새우처럼 꼬부리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잠드셨다면 깨어나서 드실 물 그릇과 함께 이부자리도 펴 드렸을텐데요.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아버지를 향하여 정면으로 버티고 섰지요.

아버지가 언제는 가족 생각을 하셨다구 저희들 밥 걱정까지 하셔요? 우리야 어찌됐든 아버진 술만 있으면 되잖아요.

아버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더군요. 나는 멈출 수가 없었어요.

평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하신적이 있나요? 식구들에게 자랑스런 가장 노릇을 한번이라두 한적이 있느냐구요. 우린 모두 다른 집 엄마들처럼 우리 어머니가 집에 계셨으면 하구요 밖에 나가 자랑할 건 없어두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를 갖구 싶어요.

아버지는 슬그머니 마루에 걸터앉더니 신발도 벗지않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군요. 나는 드디어 늘 입 안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차마 꺼내지도 못했던 얘기를 뱉어내고야 말았죠.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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