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26일 낮12시36분. 평생을 조국광복에 바쳐온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은 집무실 겸 숙소였던 경교장(京橋莊) 2층 거실에서 권총 피습으로 절명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한 노애국자를 암살한 것은 일인(日人)이 아닌 동족청년 안두희(安斗熙·당시 육군포병소위)가 쏜 네발의 총탄이었다.
▼ 누가 배후였나 ▼
백범 암살이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었다는데는 별 이론이 없다. 그동안 안두희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배후의 윤곽 또한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張興)씨는 사후 공개한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申性模)군이 소위 팔팔구락부라는 친일파 몇 장관들과 한민당과 결탁하여 백범선생 저격음모를 계획하고 당시 서북청년회 회원 안두희놈을 매수, 군에 입대시켜 총술을 가르쳐준 뒤 한독당에 입당하도록 교사하여 거사케 한 것이다.”
안두희도 생전에 몇차례 증언을 통해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과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장은산(張銀山)당시 포병사령관 등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가장 체계적인 진상조사는 국회에서 이루어졌다. 국회 ‘백범 김구선생 암살 진상조사소위’는 95년 12월 2년여의 조사활동 끝에 “백범 암살은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규정했다. 조사소위는 1차적 배후를 군부로 지목한 뒤 “장은산은 암살을 명령했고 사건 이후 김창룡(金昌龍·당시 특무대장)이 적극 개입했으며 채병덕(蔡秉德)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헌병부사령관 원용덕(元容德)재판장 신성모국방장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백범을 껄끄럽게 여겼던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미국이 사건에 개입했거나 최소한 사전 인지 또는 묵인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증거로 뒷받침된 적은 없다. 다만 ‘거사 6일전 이대통령을 만났다’는 안두희의 확인 안된 증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남북협상 논란 ▼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 주도하에 남한의 단독선거를 막고 남북협상을 통해 자주적 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백범의 노선은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특히 백범이 48년 4월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북행, 평양에서 김일성(金日成)과 남북정치협상을 벌인 일과 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에 불참한 것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비판론자들은 이같은 백범의 노선과 행동은 해방직후 국내외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옹호론자들은 “백범의 위대함은 오히려 그러한 상황의 불리를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에 타협치 않고 이념을 초월해 민족의 미래를 생각했다는 점”이라고 반박한다. 이들은 그 근거로 백범이 ‘북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던 사실을 들고 있다.
▼ 반민특위 해체 ▼
우리 현대사는 49년 한해 크게 두가지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다. 하나는 백범 암살이요, 또하나는 일제에 협력해 악질적으로 민족배반행위를 했던 친일분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해체였다. 정부수립 직후인 48년 9월 제헌국회에 설치된 반민특위는 49년 1월 중앙과 지방조직 구성을 끝낸 뒤 약 4개월간 3백5명의 반민족행위자를 검거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이승만정부는 ‘불안정한 시국에 사회지도급인사의 대량검거는 사회불안을 부채질한다’며 반민특위의 활동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여기에다 정권의 비호를 받던 일본경찰출신 경찰간부들의 비협조로 반민특위는 업무를 제대로 수행치 못하게 된다.
정부는 결국 같은해 6월 반민특위에 파견한 경찰관들을 철수시켜 특위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킨 뒤 8월 반민특위폐지안을 국회에서 처리해버렸다.
▼ 백범 연보 ▼
△1876〓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출생
△1896∼98〓일본 육군중위 살해… 사형선고… 탈옥
△1906∼09〓장련에 광진(光進)학교 세움. 양산학교 교사등 교육사업 계몽활동
△1910〓신민회 비밀회의 참석
△1911∼15〓105인 사건으로 4년간 투옥
△1919∼32〓상하이(上海)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1930〓이동녕·안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
△1932〓이봉창 윤봉길의사 의거 지휘
△1934〓한인특무 독립군 조직
△1935〓한국국민당조직
△1940〓임시정부 주석
△1941∼45〓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1945〓귀국
△1947〓반탁독립투쟁위원회 위원장
△1948〓남북협상 제창… 평양서 정치회담
△1949〓서울 경교장서 피살
〈문 철기자〉full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