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주년 특별기획]조봉암선생 장녀의 애절한 소원

  • 입력 1999년 3월 18일 19시 02분


『평소와 같이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께 면회를 갔지요. 그런데 간수부장이 ‘몸이 안좋으셔서 면회를 거부하신다’고 말하는 거예요.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산 조봉암의 큰 딸 호정(72·서울 종로구 부암동)씨. 40년이 넘었지만 아버지가 사형당한 그날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호정씨는 죽산이 상하이에서 공산계열 독립운동을 하던 때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낙천적이고 정이 많던 성격도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50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호정씨는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를 비서로 도왔다. 58년 죽산이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승만대통령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내는 등 활발한 구명활동도 펼쳤다.

“아버님이 묻힌 망우리 공원묘지에는 당국이 허가하지 않아 비석조차 세울 수 없었어요. 추모식을 벌이다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묘지관리소 앞에서 닭장차에 실려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호정씨와 남편 이봉래(李奉來·전 예총회장·98년 타계)씨는 이사갈 때도 당국의 감시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호정씨는 83년 이후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봉암의 명예회복 및 사면복권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헌법상 ‘사자(死者)에 대한 사면 복권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됐다.

91년 13대 국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조봉암 사면복권 청원서에 서명했으나 임기에 쫓겨 법사위에서 심의조차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호정씨는 조봉암의 탄생 1백주년과 서거 40주기인 올해 죽산의 명예회복과 재심청구를 위해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일 예정.

“이제 저 세상에서 아버님을 뵈올 날도 멀지 않았어요. 아버님에게 씌워진 억울한 간첩누명을 벗기고 묘소에 비석이라도 세워드리고 싶습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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