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전집’(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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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서 속없이 꽃이 또 피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소멸의 안타까움, 새로 돋는 경이로움. 생의 열망들을 빈 집에 두고 문을 잠그는 손. 누구나의 심연 속에 지니고 있는 빈 집 한 채. 그 곳에도 봄은 오고 꽃이 피었을까. 그는 그 곳에 도착했을까.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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