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성공회대 총장 이재정씨

  • 입력 1999년 4월 9일 19시 54분


1950년대 기차도 다니지 않던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온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게만 보였다. 땅에 박힌 선로를 따라 달리는 전차는 그야말로 난생 처음 보는 그런 신기한 쇠차였다. 어디 그뿐이랴. 종로를 따라 늘어선 높은 빌딩들은 나같은 시골 학생에게는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존재였다.

낯선 주변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고향에 두고 온 부드러운 뒷산이 정답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사랑스러운 그 시골풍경이며 꾸밈없이 어울렸던 친구들이 그리웠다. 차츰 나는 말을 잃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때 내 마음을 두드린 친구는 헤르만 헤세의 작은 소설 ‘차륜(車輪)밑에서’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출세의 길이 약속된 일류 라틴어 학교에 들어와 차츰 자신을 잃어 가는 비극적인 천재소년이었다. 마차의 바퀴처럼 일정한 조직과 구조 속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세계를 그의 어린 몸으로는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차츰 그는 잊어버린 고향을 꿈꾸면서 새로운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어느 사이에 나는 그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주인공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내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더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을 준 것은 이상(李箱)의 소설 ‘화분’‘날개’들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때는 나의 숨어있는 생명을 다시 찾아가는 것 같은 진솔한 작업이었다. 그것은 마치 한장 한장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보물을 찾아내고 기쁨을 감출 수 없는 감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어 읽은 신영복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思索)’은 과거의 감격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가슴 깊이 새겨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감옥 속에서 차곡차곡 채워간 사랑이라는 말 이상의 고귀한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은 세계와 사회와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뜻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책이 밝혀 내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색’으로부터 새로운 행동으로 옮겨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독서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진지한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재정<성공회대 총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