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특히 한자 초서(草書)해독의권위자로초서 해독자가 급격히줄어들고있는 상황에서 고문서 해석에 큰 기여를 했다.
유년시절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던 고인은 14세 때 한문서당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의 길에 뛰어들었다. 일제말 고향인 충북 옥천과 대구를 오가며 한학에 매진, 광복 직후 대구사범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동양의약대와 성균관대에서 한학 공부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그의 학문에 전기가 된 것은 5·16 이후 ‘혁신교수’라는 이유로 성균관대에서 쫓겨난 일. 그후 전국의 산과들을 찾아다니며 금석문연구의 길로 접어들었다. 국내에서 금석문 탁본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고인은 63년 태동고전연구소, 74년 지곡서당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 지곡서당 출신자들은 국내 국문학 한학 역사학 미술사학계의 중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