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이 작고 벌거벗은 한 인간이 얼룩말 시체 옆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말은 죽은 지 이미 사나흘 되어 썩기 직전의 상태. 그는 입으로 찢어낸 고기 조각을 오른손에 옮겨든 다음 고개를 쳐들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백86만4천3백28년 전 어느 날의 풍경. 책의 제1장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도입글이다. 47년간 인류학을 연구하고 35년간 대학에서 가르치며 쉬운 글쓰기에 매진해온 필자의 역량이 소롯이 드러난다.
인류가 지구 상에 태어난 때는 약 5백만년 전. 그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을 1년으로 친다면 농경 생활을 시작한 때는 그 마지막날인 12월31일 오전. 이날 오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인류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꾼 12개의 굵직한 주제를 저마다 하나의 장으로 구성했다. 각 장의 제목도 독특하다. 북북동으로 진로를 돌려라, 현인이 등장한다, 노예, 정복, 말씀, 기계, 이용, 미래 등.
각 장 앞부분에서는 시기마다 인류의 삶을 소설형식으로 생생하게 재현한다. 이방인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뇌수(腦髓)를 먹는 베이징 원인(原人), 동굴 벽화 앞에서 춤추는 원시인, 서판(書板) 조각에 글씨를 남긴 메소포타미아 필경사의 생활, 아즈텍인들을 무참히 살해한 스페인의 장병 등….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각 시대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추리력으로 재구성한 인류의 역사는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흥미롭게 다가온다.
각 장 뒷부분에는 앞의 이야기를 주제로 ‘강의실에서의 토론’이 뒤따른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연상케 하는 교수 학생간의 질문과 대답 속에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명사의 쟁점들을 풀어나간다. 도구의 발명, 동식물의 사육, 도시생활, 신세계 정복, 산업혁명, 종교와 과학의 전파 등이 주요 테마.
저자의 일관된 시각은 ‘인간 중심주의’와 ‘자민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이런 의미에서 19세기는 ‘발견의 시대’가 아니라 ‘정복의 시대’로 정의된다. 서구인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아메리카에서는 2만년 전, 아프리카에서는 5백만년 전부터 인간이 살아왔기 때문.
또 유럽인들은 남북아메리카 파푸아뉴기니 등의 식인습관을 야만적이라고 비판했으나 정작 중세 종교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화형하고 정치체제 수호를 위해 수백만명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은 유럽인이 아니었는가 반문한다. 그래서 문명과 야만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장은 인류학자가 본 인간의 ‘미래’. 2억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처럼 인류도 지구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인류가 사라진 지구의 새 주인은 누가 될까요? 안전한 하수구에서 살아남은 바퀴벌레가 지구를 지배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테이크오버’ ‘역사의 다른 쪽’ 등 다양한 저서를 펴냈다. 매끄러운 번역도 책읽기를 편하게 만든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