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첼리비다케 「死後 첫음반」나왔다

  • 입력 1999년 4월 18일 19시 52분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1912∼1996). 관객을 설득하기 보다는 교훈을 주려 했고, 반듯한 균형 보다는 귀가 번쩍 뜨이는 ‘깨우침’으로 다가가려 했다. ‘충직한 해석자’가 아니라 작곡가와 대등한 존재이기를 원했던 사제(司祭)와 같은 지휘자.

그런 그이기에 생전에 레코드를 ‘깡통음악’으로 치부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연주의 개성은 연주장의 분위기, 음향 등 여러가지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 무시한 채 현장에서 벗어나 듣는 음악은 가짜다”라는 지론.

그러나 그가 서거한지 몇해도 지나지 않아 그의 뜻과는 달리 세계 음반계가 ‘첼리비다케 열풍’에 후끈 달아 올랐다.

도이체 그라모폰(DG)사는 최근 70년대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실황을 담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발매했다. 이는 지난해 EMI사가 그의 80∼90년대 명연주를 담은 ‘첼리비다케 전집’(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내놓아 팬들의 관심을 끈데 대한 대응.

왜 첼리비다케인가. 흥분의 이유는 세 가지. 생전 음반 제작을 거부한데다 카라얀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실력, 요즘 지휘자들에 대한 실망 등으로 분석된다.

그가 음악계의 큰 별로 떠오른 때는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부역혐의로 활동을 금지당해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나자 루마니아에서 온 ‘천재 유학생’ 첼리비다케가 그 자리를 맡아 8년간 활약했다. 55년 단원들은 스타성 강한 카라얀을 수장으로 뽑았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첼리비다케가 낫다’는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89년 이후 카라얀 번스타인 솔티 등 시대를 버텨낸 지휘계의 거성들이 잇달아 사라졌다. 뒤를 이을 중량감있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필의 지휘봉을 잡은 아바도는 ‘카리스마가 없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주빈 메타는 뉴욕 필하모니를 퇴보시켰다는 비판 끝에 91년 ‘낙마’했다.

마젤 오자와 등 비슷한 연배의 지휘자들도, 마주어 플레트뇨프 등 구동구권 출신 지휘자들도 스타성은 떨어진다는 평. 이런 무력감 속에서 첼리비다케의 녹음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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