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사상계’에 ‘아겔다마’로 데뷔한 그는 69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71년 소설집 ‘열명길’ 75년엔 이민지에서 보내온 2백자원고지 3천장 분량의 전작 장편 ‘죽음의 한 연구’가 발간됐다.
작가부재의 상황에서도 그의 작품은 소설가 시인 평론가 등 소수의 마니아들 사이에 밀교(密敎)의 제의문처럼 돌려져 읽혔다. 8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재발간된 ‘죽음의 한 연구’는 소리소문없이 27쇄 3만여부를 넘겼다. 이 책의 1장 첫 문장이 무려 4백자에 이르는 등 낯선 서술방식으로 쓰여진 점을 고려한다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왜 읽기에 편하지 않은 그의 소설이 발간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열광적으로 읽히게 된 것일까? 작가의도와는 별개로 이는 90년대의 문화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박상륭의 작품은 세기말의 두 키워드인 에로스(性)와 타나토스(죽음)를 치밀하게 구사하며 삶의 근원을 파헤쳐 들어간다. 기독교 선불교 힌두교 라마교를 넘나드는 작품 속 신화세계의 이미지도 풍부하다.
90년대는 관능과 죽음을 한 화폭에 담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복제화가 길거리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의 브로마이드와 함께 팔려나간 시대.그의 작품은 이런 시대정서의 변화와 함께 ‘자생적인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귀한 전범(典範)으로 재발견됐다.
“박상륭 문학은 명민한 자아의식, 언어 구축, 영(靈)적 직관을 각기 확보하고 있는 우리문학의 근대적, 탈근대적 성과물이다.” (시인 김정란) “종교인류학의 시각으로 근대의 뿌리를 우리 문학 안에서 찾으려는 여행이다.” (평론가 김인환) 등의 찬사가 새롭게 보태졌다.
오랜 침묵을 깨고 94년 장편 ‘칠조어론(七祖語論)’을 완간한 작가는 지난해 9월 영구 귀국했다. 23, 24일 예술의 전당 주최로 ‘박상륭문학제’가 열리고 소설집 ‘평심’과 산문집 ‘산해기’(문학동네)가 때맞춰 출간됐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