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이 항일 독립운동을 하셔서 더욱 힘들었다. 일본 경찰이 집 안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터에 읽고 싶은 책을 마음놓고 손에 들고 있을 처지도 되지 못했다. 일경이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의 ‘한국역대소사’와 매천 황현(梅泉 黃玹)의 문집까지도 서고를 뒤져 압수해가는 판이었으니까. 책읽기를 즐긴 나는 집안 서고에서 밤낮을 거꾸로 보내는 버릇을 얻었는데, 칠십을 넘긴 지금에도 이 버릇은 그대로다.
열살 안팎에 성탄(聖嘆)의 ‘삼국지연의’를 열심히 읽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얼마나 읽는 데 열중하였던지 식탁에서 화장실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읽어나가면서 그 방대한 등장인물들의 상이한 개성, 지혜와 용기, 풍운과 흥망이 아우러진 일대 장편 서사시에 완전히 매료됐다.청년시절에는 중국의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었는데 그 중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이 가장 기억에 남고 지금도 가끔 읽는다. 도덕경은 철학 미학 군사학 등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또 고전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미(美)의 정신세계를 보였준다. ‘청 황 적 백 흑 등 오색을 구분한 것은 오히려 인간의 감각을 규제해 그것 밖에 보지 못하는 소경을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의 미의식은 규제할 수는 없다는 생각, 겉으로 드러나는 풍경과 색은 가변성이 있으니 그 속의 본질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도 언제나 읽는 재미를 준다. 사마천은 역사를 왜곡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마천의 이같은 살아있는 정신을 만나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다.
최근에 도교적 초월의 세계를 제시한 중국의 고전 ‘갈홍전서(葛洪全書)’와 동양예술정신이 집대성된 ‘산호망화발(珊瑚網畵跋)’을 읽고 있다. 특히 ‘산호망화발’은 명나라시대의 유명한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쓴 그림비평과 감상법을 묶은 책으로 미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서세옥(한국화가·서울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