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신경숙씨 독후감★
작가에게 글을 쓰지 못하는 10년의 기간이란 어떤 세월일까? 쓰는 일 또한 스스로 만든 형틀에 매여 고통받는 순간의 연속이지만,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세월이 10년간 이어졌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석영이 10년만에 쓰는 소설은 어떤 소설일런지 궁금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오래된 정원’을 읽고 있는데, 이게 10년 동안 작품을 쓰지 못했던 분의 글일까 싶게 사람이나 풍경이나 사물에 대한 감각이 유연하며 침착하고 젊다. 거기에 인생경험이 풍부한 작가의 사려깊음이 도처에 상처로 응어리져 있는 과거를 생생하게 현실로 이끌어와 복원시킨다.
이제는 모두 지나갔다고 여기는 상처의 시절, 그러나 청대같았던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 한윤희가 기록으로 남긴 노트를 따라 읽는 어느 대목에서는 메마른 내눈가에 언뜻 눈물이 돌기도 했다. 이제는 이 지상에 없는 그녀는 이런 슬픈말을 편지에 남겨 놓는다.
“…사람이 죽으면 정이 맺혔던 부분들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대요.” 그렇겠구나.그럴테지…싶은 공감 하에 드러나는 인간살이의 애달픔이 처처에 자리잡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한 문장쯤은 밑줄을 그어놓고 싶을만큼 감동적인 문장이 나온다고 나에게 독후감을 전하기도 했다.
‘말을 잃고 감정을 잊고, 추억조차도 표백’시킨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주인공이 텔레비전의 북어국 끓이는 요리강습을 쳐다보며 따스한 집을 연상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나, 6·25 격전지에 세워진 절에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빨치산의 넋들이나, 어린 시절 반공포스터를 그려서 상을 받은 윤희가 실패한 변혁운동가였던 아버지에게 혼나는 장면들은 다시 읽히고 다시 읽히는 장면이다. 연재를 앞두고 있던 작가는 ‘오래된 정원’은 “여기서 살아온 같은 시대 어느 남녀의 긴 사랑에 관한 기록이며, 역사 속에 개인을 담는 방법이 아니라 가녀린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씌어질 것”이라고 했었다. 다른 사람의 작의가 아닌 황석영의 작의여서 그동안 제쳐진 변방들이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고 문학 속으로 포용될 것같은 기미를 느꼈다.
그래서일까. 작품 속에서 이제 출옥한 주인공에게 후배가 “형님은 자기 노선이 있소?”라는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은 웃지 않고 마음 속으로 자기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 만약 그런 게 남아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텐데.
이 소설이 끝날 즈음엔 ‘오래된 정원’이라는 이상향이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희망의 장소로 각인되어 있을 것같은 예감이다. 상처투성이의 역사 속에서도 윤희가 남긴 딸 은결이와 주인공이 앞으로 어떤 만남, 어떤 시간을 갖게 될 것인지도 자못 궁금하다.
★줄거리★
오현우. 80년대 초반 반정부 조직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았다가 18년만에 가석방된 사내.
‘광주’라는 말을 들어도 이제는 울렁거림이 없는 그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한 존재가 있다.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 한세월을 함께했던 연인 한윤희.
그러나 세상과 그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었던 윤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긴 채….
옛 동지들을 찾아 광주로 내려간 현우는 “이제 여기는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는 후배의 말을 등지고 윤희와의 보금자리였던 갈뫼를 찾아간다.
윤희는 언젠가 그가 갈뫼로 돌아올 것을 예견한 듯 홀로 견뎌낸 세월을 한묶음의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 글들을 통해 자신과 윤희가 거쳐온 역사를 복원해가던 현우는 그들 사이에 은결이라는 딸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되는데….
★작가의 근황★
작가 황석영(55)이 감옥에서 나와 제일 먼저 장만한 살림살이는 컴퓨터였다. 그는 ‘오래된 정원’의 원고를 이메일로 보내온다. 야행성인 그가 밤새워 쓴 원고를 전송하는 시간은 새벽5,6시.
원고지에서 컴퓨터로 글쓰기의 환경만 바뀐 것은 아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소설 주인공 오현우가 혼자 큰 길을 걸으며 식은땀을 흘렸던 것처럼 작가도 한동안 자신이 보는 풍경의 공간감이 느껴지지 않거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소에서 먹먹해지는 부적응증을 겪어야 했다. 가끔 친구나 후배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질 때면 달이 덩실한 밤, 감옥 독방에서 혼자 불렀던 가곡 ‘달밤’을 물기어린 목소리로 부르곤 했다.
무엇보다 그는 ‘오래된 정원’을 통해 작가로서 세상에 한 약속을 지키고 있다. 98년 3월13일 공주교도소 앞에서의 출소 기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제 작품으로 말하겠다”고 다짐했다.
1년여가 흐른 지금 그는 세상 소음에 몸을 섞지 않고 매일 밤 면벽수도하듯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는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