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청준씨, 佛 강연내용]

  • 입력 1999년 5월 4일 19시 33분


내 소설쓰기의 근원에는 외종형이 자리잡고 있다.

6·25 전쟁 당시 외종형은 하룻밤 사이 이웃 사람들에게 온 가족을 잃고 혼자 야반 도주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옛 마을로 돌아와서도 누구에게 보복이나 원망도 없이 묵묵히 지내던 외종형이 하루는 우리 집엘 찾아와 바야흐로 중학생이 될 내게 말했다.

“너, 공부로 힘을 얻어 남 위에 올라 앉아 사람들을 부려먹고 살 생각은 말거라. 너 혼자 네 옳은 길을 찾아 살 공부를 하거라.”

내가 일견 세상살이의 힘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보이는 문학과를 택하고 소설가가 된 것은 필시 그 외종형의 삶과 충고 때문이다.

앞으로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나는 옛 고향의 관습을 떠올린다. 우리 고향에선 밤길을 가다가 도중에 사람을 만나면 “좀 전에 당신 앞서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건 없었건 상대방의 밤길에 위안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다.

목적지조차 믿을 수 없는 암담한 노정,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길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겐 허구의 선행자 이야기가 필요하고 또다른 후행자를 위해 자신의 작은 발자국 흔적이라도 남겨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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