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1932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백낙승(白樂承)씨는 일제시대 가네보의 후신으로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홍콩을 무대로 한 무역상이었다. 또 그의 조부 백윤수(白潤洙)씨는 나라가 국상을 당하였을 때 만조백관이 입을 상복과 제복 일체를 도맡아 제조하였던 섬유업자였다. 당시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백씨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로 이들 부자는 섬유업계의 대부 격이었다.
백남준의 부친이 태창방직을 설립 한 것은 일종의 선대사업의 대물림이었으며 그의 가문은 구한말에서 일제기를 거치는 격랑의 시기에 일찍이 사업에 눈을 떴던 이른바 개화된 집안이었다. 백씨 집안이 왕실의 상복을 독점, 생산할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남다른 사업수완을 입증하는 것이고 이른바 국가조달사업에 깊숙이 관여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로 인하여 백남준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선친으로부터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고 커서 반드시 훌륭한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도 받아왔다.
예술가가 되려던 백남준이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던 부친과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일은 후에 백남준이 부친의 뜻을 거스른 채 일본도쿄대학 미학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백남준은 처음에는 도쿄대 상과에 입학하였노라고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학교측에서 한국에 보낸 가정통신문에 미학과 입학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날아들었을 때, 그의 부친이 기가 막혔을 모습은 가히 상상이 가는 일이다. 이 때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사실상 남남처럼 다른 길을 걷게되며 부잣집 아들, 사업가의 아들로서의 백남준은 길고도 고단한 예술가의 후예로 완벽한 전환을 하게된다.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큰누이 희득(熙得)의 피아노레슨 시간을 이용하여 어깨너머로 슬금슬금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우리의 사정으로 보아 피아노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며 또 그것을 배운다는 사실도 여간 특수한 일이 아니다. 애국유치원과 수송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백남준은 “남자가 시끄럽게 피아노를 뚱땅거리면 못쓴다” 는 부친의 엄격한 훈계에 따라 공식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가 제대로 피아노를 배우게 된 기회는 경기공립중학교(당시 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경기중학 음악교사는 전 동아일보 사장 오재경(吳在璟)씨의 부인이었던 피아니스트 신재덕(申載德) 선생(전 이화여대음대학장, 89년 작고)이었다. 신재덕 선생은 재주덩어리인 백남준에게 피아노뿐만 아니라 작곡과 성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음악수업을 시켰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가 이건우(李建雨)를 만난 것도 백남준에게는 향후 그가 음악가가 될 결심을 하게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백남준은 간혹, ‘한국음악의 르네상스기’ 라는 거창한 표현을 할 때마다 이건우와 김순남(金順男)을 거론한다. 후에 이 문제는 별도로 언급하겠지만, 해방공간에 우리 음악계에 혜성처럼 나타났었던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사상문제와 관련하여 월북하거나 국외로 떠나간 일들은 우리 음악사에서 다시 한번 짚어보아야 할 중요한 이슈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백남준은 김순남과 이건우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고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다.
백남준이 이건우로부터 사사받고 있을 무렵, 그는 다섯 개의 간단한 곡을 작곡했다. 그가 14살이던 경기중학 재학시절인 46년에 만든 첫 작곡은 그 자신도 명확히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다음 해의 두 번째 곡 ‘향수’는 월북시인 조벽암(趙碧岩)의 시에다 곡을 붙인 것이었다. 이 두 악보는 6·25동란 중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후에 백남준이 기억을 더듬어 재생시킨 불완전한 악보가 남아 있다. 그의 재생악보에는 향수라는 시 제목을 기억해내지 못하여 시 귀 가운데 하나인 ‘짭조름’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이 저린 여로(旅路) 오늘도 나그네의 외로움을 차창에 맞기고
언제든 갖 떨어진 풋 송아지 모양으로 안타까이 못 잊는 향수를 반려하며
아늑히 살 어둠 깃들인 안개 마을이면 따스한 보금자리 그리워 포드득 날라들고 싶어라
백남준은 이 시기에 시판된, 20세기 현대음악의 거장 아놀드 쇤베르그 레코드를 어렵게 구하여 연구하였다. 47년에 백남준이 구한 일제 쇤베르그 레코드와 그에 대한 연구는 우리 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의 쇤베르그 전문연구가이던 당시 프린스턴대학 밀턴 배빗 교수가 쇤베르그를 처음 미국에 소개한 것이 48년인 점을 감안하면 백남준의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미국보다도 1년이나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그는 도쿄대 졸업논문도 ‘아놀드 쇤베르그 연구’로 정하게 된다.
쇤베르그 음악의 난해도를 감안한다면 당시 그가 얼마나 쇤베르그를 이해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마르크스이론을 탐독하며 쇤베르그 음악을 듣고, 월북시인의 시집을 읽는 따위의 청소년기의 낭만은, 한편으로는 남다른 개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청년지식인들의 유행이었으며 백남준도 그 익명적 무리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백남준은 2차 피난대열에 합류할 예정으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이론에 심취하였던 이상주의자 청년이 마르크스이론으로 무장한 마르크스군대를 영접하고자 하였던 이념적 참여정신이 백남준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백남준의 가택을 점령한 마르크스군대가 한 일은 집에 있는 세간을 뒤지고 남아 있는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난 것이다. 이상주의 청년 백남준과 마르크스의 인연은 이렇게 순탄치 않은 출발을 보였으며 이 사건은 청년 백남준에게 이념과 현실의 갭을 판단케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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