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마이, 저게 무슨 소리네?”
“눈보라를 갈라치는 버들가지 물오르는 소리지.”
추운 겨울밤. 사납게 눈보라치는 소리는 그렇게 스산할 수가 없다. 잠이 깬 손자의 물음에 할머니는 ‘버들가지 물오르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소리는 바로 한겨울을 갈라치는 소리라고. 그래서 이 땅의 아이들은 봄을 안고 겨울잠에 들곤 했다….
백기완(66). 검은색 도포자락에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중집회를 이끌던 재야운동가. 67년 장준하선생과 함께 설립해 30년 이상 지켜온 ‘통일문제연구소’의 문을 재정난으로 닫던 지난해 1월 어느날. 백기완은 눈물을 쏟았다. 군사정권시절에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렵게 지켜온 연구소인데….
그리고 그는 책을 썼다.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백척간두 벼랑 위에 자라는 소나무. 자신의 뿌리로 벼랑을 거머쥐지 않으면 벼랑도 자신도 한꺼번에 넘어가는 형국이다. 바로 분단된 조국 한반도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백씨는 이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연구소 살리기운동에 나섰다.책은발간되기도전에 1만권 예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아무리 죽음처럼 가라앉은 늪이라고 하더라도 던지는 돌멩이 하나에 ‘퐁당’하고 파문이 일 수 있는 법. 그는 ‘새뚝이’처럼 허무주의와 무기력에 빠진 세상을 향해 말뜸(화두·話頭)을 던지며 다시 일어섰다.
이 책은 자전적 수기와 소설형식의 글모음. 젊은 날 농민운동 통일운동을 하면서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눈물과 웃음이 담긴 인생이야기, 한 겨울에도 봄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보통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사랑을 담은 옛이야기, 탐욕으로 가득찬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질타가 담겨있다.
구수한 우리말과 문학적 상상력이 가득찬 이야기는 판소리 가락처럼 흥겹고 웅변을 듣는 듯 호쾌하다. 욕지거리 등 거친 표현은 백씨 특유의 질박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지만 종종 눈에 거슬린다.
“닭이 사람과 같이산 지는 한 2만년 됐지. 그러다 보니 날 줄도 모르고 제 집도 못짓는 동물이 됐어. 어느 날 닭이 울타리를 넘어 달려가 옛살라비(고향)를 찾아간거야. 숲이 우거진 곳에서 짐승들을 피해 죽어라고 도망다니고 제 손으로 먹이를 구하다 보니 어느덧 날기 시작했어. 닭의 원래 이름인 ‘질라라비’로서의 본성(本性)을 찾은 거지. 크기도 애소리(송아지)만 해졌어.사람들은 이를 보고 봉황이라고 불렀지.”
그는 ‘질라라비, 훨훨’이라는 옛이야기를 통해 대륙적 본성을 잃은 채 반도에 갇힌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훨훨 날기를 기대한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