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한시는 중국과의 교섭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다. 명나라의 사신들이 오면 조선의 접대관들이 함께 어울려 시를 주고 받게 되는데, 명에서도 초기에는 무례한 환관들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후에는 반드시 시문(詩文)에 능한 지식 인사를 임명했다. 조선 관리들의 한시 실력은 중국 사신들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들의 오만과 횡포를 막는 작용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시가 일종의 외교력을 지녔고, 국가의 문교(文敎) 역량을 과시하는 매체가 됐다.
역대 양국 관리들이 주고받은 한시들은 조선측에서도 모아 엮었는데 이것이 ‘황화집(皇華集)’ 50권이다. 이 거대한 시집의 첫째권이 세종 32년 조선을 왔다간 명나라의 예겸(倪謙)과 우리의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이 창화(唱和·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는 것)한 시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 예겸이 사적으로 남긴 ‘요해편(遼海篇)’을 최근 명지대와 LG연암문고가 입수했다고 해 필자도 이를 살펴봤다. ‘요해편’은 이미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 속에 이름과 내용의 일부가 알려져오기는 했으나 그 전모는 알기 어려웠다.
‘요해편’은 예겸의 조선 기행 시문집으로 △여행 도중에 읊은 시 △조선에 와서 창화한 시 및 체류 동안의 일기인 ‘조선기사(朝鮮記事)’로 구성돼 있다. 그가 시에 능한 반면 접대관인 정인지의 시가 달리자 세종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가세시키기도 했다. 이로써 우리는 예겸과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시를 더 잘 알게 됐다. 명과 조선의 외교관들이 공식적으로 우호 존중의 입장에서 한시로 창화한 최초의 시문집이 오랜 세월을 지나 세상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극히 드문 사례다.
청대에 내려와서도 중국으로 사신을 따라간 문사(文士)들이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개인적으로 중국의 문사들과 교제해 시를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이를 청말의 시서화가인 동문환(董文煥)이 ‘한객시존(韓客詩存)’이란 이름의 시문집으로 남겼다. 최근 한국 한림대와 중국 산서(山西)대가 이를 공동 간행한 것은 양국간 한시 교류의 전통이 근세에까지 내려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병익 <문화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