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이나 4로 시작되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사람들의 인생행로를 그리면 어떤 배경이 공통적으로 드리워질까.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무렵 우리말과 함께 뒤섞여듣던 일본어, 사춘기를 무섭게 할퀴고 간 6·25전쟁, 젊은 피를 뜨겁게 했던 4·19의 함성, 5·16과 유신, 고개숙인 중년으로 광주에 대해 침묵해야 했던 80년대….
여기 그 시대를 거쳐온 네 사람의 산문이 있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소설가 박완서(68), 시인 신경림(64), 국문학자 김윤식교수(63·서울대), 평론가 김병익(60·문학과지성사 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펴내는 계간지 ‘내일을 여는 작가’의 98년도 기획연재 산문을 책으로 묶은 것.
“무엇보다 지난 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에 대한 요구가 절실했다. 세대간 단절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도 문제였다”는 게 이 계간지 편집진의 설명.
필자들이 산문으로 고백한 ‘나의 삶’을 읽다보면 한 개인이 어떻게 역사를 내재화하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김윤식교수는 ‘카프’(KAPF·일제하에 활동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약칭)문학을 연구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료더미 속의 삶이 진실이고, 가정이나 직장생활이 오히려 환각으로 보이는 세월’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문은 현실과 결코 따로 있지 않았다. 자료입수 등과 관련해 두 차례나 정보기관으로 끌려갔던 경험을 통해 ‘관념과 현실, 회색과 녹색을 잇는 통로’를 만났던 것이다.
기억 속의 인상적인 장면마다 노을이 묻어난다는 신경림 시인. 그의 노을풍경에는 종일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고 전기며 수도도 없던 60년대 홍은동 ‘산비알’의 루핑집과 그 노을을 보기 위해 산을 넘어오던 김관식 천상병시인이 있다. 산동네 젊은이들의 애달픈 연정을 그린 ‘가난한 사랑노래’같은 것은 이런 밑그림 속에서 탄생한 것이리라.
박완서.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들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독법이 탁월한 소설가. 고모를 두고 혼자 월남한 고모부를 통해 분단극복의 과제를 짚어낸다. “고모를 찾아야지, 찾아야지”하면서도 재혼한 부인과의 갈등이 두려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고모부의 이중성과 무력감을 꿰뚫어본 작가. “우리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관계끼리 안으로 보듬어 안는 힘이 강한 만큼, 우리 아닌 남을 밀어내고 헤치려는 힘 또한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 것 같았다.”
4·19세대 문인 대표주자인 김병익의 “나는 그날 벤치에 앉아 교문 밖으로 나가는 시위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는 고백은 의외다. 엄숙함과 진정성이 없어보이는 저항행위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신념에 찬 불참여’는 그에게 더 치열한 역사의식을 품게 했다.
한국문학의 한 이정표들이 펼쳐보이는 중후하고 살내음 나는 산문들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