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었다면 20세기 재즈의 역사는 씌어질 수 없다. 깡마른 몸매에 왜소한 체구, 퀭한 눈빛의 그는 40년 넘게 재즈계를 주름잡았던 재즈계의 왕 중 왕. 마일스 데이비스(1926∼1991). 재즈 트럼펫 주자이자 작곡가 및 밴드 리더였던 그는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등과 함께 재즈사 최고의 명인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화려한 연주테크닉보다는 끊임없는 실험과 모험으로 비밥 쿨재즈 하드밥 프리재즈 퓨전재즈 등 재즈사의 스타일을 창조해나간 ‘혁명’으로 대가가 된 그의 자서전이 국내에 번역됐다. 작고 2년 전인 89년 그가 구술하고 작가인 퀸시 트루프가 기록한 이 책은 재즈의 본거지 뉴욕 52번가를 그대로 옮겨온 듯 생생한 재즈사의 이면을 거리낌없는 구어체로 보여주고 있다.
치과의사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흑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유복하게 자란 마일스는 중학생 때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준 트럼펫을 불면서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다.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진학했지만 정작 그가 음악을 배운 곳은 할렘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라는 클럽이었다. 매일 밤 이곳에서 음악을 듣거나 트럼펫을 연주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그뒤 줄리아드를 중퇴한 그는 당대 최고의 명인 찰리 파커의 밴드를 거쳐 49년 역사적 앨범 ‘쿨의 탄생’을 발표, 50년대 쿨재즈의 길을 열어 놓는다.
사람들이 쿨의 들판에서 마음껏 휴식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들판을 가로질러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59년 그는 ‘카인드 오브 블루’를 발표해 즉흥연주를 완전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어 69년에는 록 음악을 받아들여 재즈사상 희대의 실험작 ‘비치스 브루’로 퓨전재즈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컴퓨터 합성 디지털음을 소화해 ‘투투’‘아우라’ 등을 발표한다.
그는 항상 시대를 앞서갔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시대를 잘 수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비어 있었다. 그 여백에 시대적 정황과 젊은 연주자들의 숨소리, 그리고 자신의 ‘쿨’한 톤이 들어갔다.
이 책에는 또 프랑스 샹송가수 쥘리에트 그레코와의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 한때 섹스와 마약에 탐닉했던 시절, 백인 정치가들에 대해 분노했던 일 등을 가식없이 보여주고 있다.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간혹 욕설도 그대로 싣고 있다.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
〈윤정국기자〉jk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