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책]김석철/동서양 넘나들며 쌓은 「영혼의 富」

  • 입력 1999년 5월 21일 19시 28분


고등학생시절 ‘전쟁과 평화’를 읽었을 때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불콘스키 공작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일들이 나의 생각 바로 그것이었다. 한동안 나타샤 피에르 안드레이 공작과 함께 북해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것 같았다. 그 나이가 된 아들에게 그 책을 읽으라고 권한 이유도 그 때의 감동이 40년 지난 지금까지 가슴에 울려오기 때문이었다.

철학과에 가서 수리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할 작정이었기에 하루 두 시간씩 한학자 호정선생께 가서 ‘대학’과 ‘논어’를 읽었다. 글 하나 하나의 뜻을 새기며 이해하는 책읽기가 일년여 계속됐다. 두 시간을 꿇어앉아 배우며 하루하루 동양 고전의 깊은 바다에 빠져들었다. 선생의 댁을 나와 집으로 오는 동안 그날 읽은 것을 되새기며 걸었다.

생각지 않았던 건축과로 가게 돼 처음 2년은 방황했다. 그 때 ‘엘리어트 선집’을 읽었다. 그의 명징한 언어들이 헤매던 나의 마음을 잡아주었다. ‘황무지’보다 ‘네 사중주’와 그의 산문들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서서히 건축에 몰두하면서 책읽기 대신 그리는 일이 생활의 대부분이 됐다.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세울 때는 세계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책들을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읽었다. 그 때 읽은 책 속의 건축과 도시를 찾아다닌 기록이 97년에 펴낸 ‘세계건축기행’이다.

작년부터 베니스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어 일년에 넉달은 베니스에 있게 됐다. 강의가 있는 날과 준비해야 하는 전날 이외엔 밤 12시까지 대학도서관에서 모처럼 마음껏 책을 읽는다. 40년만에 ‘대학’과 ‘논어’를 영어로 다시 읽었고 ‘주역’과 ‘도덕경’을 옥편과 씨름하며 읽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였으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전당을 설계하면서 매주 산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산에서 내려오면 교보문고에 들러 서너권씩 책을 사 일주일 동안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그 시간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지난주에는 중국 바깥에 사는 ‘중국인 이야기’와 분단시대의 좌절과 희망을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한 책읽기를 새로 배우고 있다. 인터넷은 멋진 신세계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도서관과 책방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한다.

책과 내가 하나의 새로운 만남을 이룰 때 책읽기의 즐거움이 더해진다.펼치면 문득 한 세상이 시작되고 거기서는 누구나 마음의 백만장자가 된다.

김석철<건축가·이베니스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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