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 당선소설 이미혜씨 「사라진 서재」출간

  • 입력 1999년 6월 1일 21시 45분


“있지 않은 문학작품에 대한 갈망이 내게 소설을 쓰게 했다.”

99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가 이미혜(39). 소설가이기 이전 그는 소설읽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불문학박사이며 대학강사이자 번역자였던 것.

그의 시선은 늘 소설이 다루는 ‘강렬한 순간’이 아닌 그 뒤의 이야기들을 좇았다. 잔인한 운명에 할퀴었든, 지독한 사랑이나 사랑의 실패가 있었든, ‘그래서 그 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늘 궁금했다.

최근 출간된 여성동아 당선작 ‘사라진 서재’(동아일보사간)에서 그는 보통의 소설들이 비켜가는 것, 어떤 사건 후의 시간을 찬찬히 좇아간다.

화자는 60년대 서울 왕십리 영세가구 공장집 셋째딸인 아홉살 소녀. 외도하는 남편을 눈감아주지 않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이혼을 한 할머니, 할머니의 재가로 입은 상처를 평생 ‘침묵’으로 앙갚음한 아버지, 밝고 활기찬 성격의 어머니가 이룬 중산층 가정이다. 소녀의 세계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중앙시장과 영미다리로 제한돼 있다. 그 너머 하꼬방 동네같은 것은 ‘세계 밖’이다.

일제 하의 사상검속, 해방, 좌우익대립, 6·25 등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각자의 삶을 관통하며 지나갔지만 ‘사라진 서재’의 등장인물들은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들이다.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운명을 견뎠을까?

‘할머니들은 전장에서 함께 싸우다가 살아남은 군인처럼 평상시의 협소한 가치나 예의범절을 뛰어넘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대범함을 터득하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소설 전체를 휘젓기보다는 마치 배경처럼 녹아있는 서술. 극적인 사건들조차도 의도적으로 감정을 한 차례 여과시키고 타자에게 증언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는 때로 소설읽기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정과리(문학평론가)는 여성동아 심사에서 이런 작법에 대해 “사소한 일상의 사건들을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끌어올리는 게 소설이라는 고전적 원칙을 새삼 환기시켜준다”고 평가했다.

작가는 60년대 서울 변두리의 시대사를 촘촘하게 그려낸다. 평화시장에 물건을 대는 가내공장이 즐비했던 청계천변 풍경, 바야흐로 여의도와 강남이 개발돼 ‘이사만 몇 번 잘 해도 부자가 될 수 있었던’ 한국적 부의 축적과정 등 60년 서울생이 그릴 수 있는 도시사의 재구성이다.

이제는 작품 속 어머니만큼 나이 먹었지만 소설 속의 나는 언제나 왕십리 옛집을 꿈에서 본다. 지금의 나를 만든 사소하고도 소중한 기억의 입구.

‘그렇게 꿈길을 헤매다 보면 입가가 헌 계집아이가 할머니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조잘거리던 시간에 이르게 될까? 떠나온 시간을 찾아 지금은 복개되어 없어진 개천가를 서성이면…’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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