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⑥]일생의 동반자 조셉 보이즈

  • 입력 1999년 6월 3일 19시 53분


《62년 5월 독일의 뒤셀도르프. 백남준은 이 예술도시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었다. 이 콘서트의 제목은 ‘바이올린 독주(One for Violin)’였다.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3분에 걸쳐 아주 천천히 들어올린 뒤 갑자기 내리쳐 박살을 내버리는 매우 격렬한 양식의 공연을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바이올린을 들어올리는 순간 갑자기 객석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백남준의 퍼포먼스를 객석에서 지켜보던 뒤셀도르프 시립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가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내려치려는 순간 “바이올린을 살려주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신이 밥 먹고사는 악기가 어느 하찮은 동양인에 의하여 박살이 나려는 장면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항의였다. 이때 객석에 있던 어느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그를 향하여 다시 소리쳤다. “이봐, 콘서트를 방해하지 마!” 이들은 서로 언쟁을 하다 드디어 실력대결이 벌어졌고 이 건장한 신사는 바이올린 주자를 연주장 밖으로 쫓아냈다. 잠시 후 바이올린은 백남준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다. 연주가 끝난 뒤 그는 백남준에게 다가와 자신을 소개하였다. 조셉 보이즈!》

백남준은 그가 죽었을 때 추모제를 지내면서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즈와 거의 무명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눈 덕분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형제나 다름없이 가까웠고 보이즈는 낯선 독일에 살던 한국인 백남준을 극진히 보살펴주며 동시에 퍼포먼스를 함께 열어 자신과 동반자 관계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켜주었다. 이들이 어떻게 서로 급속하게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의 문제는 같은 플럭서스 멤버였다는 점, 또 사상과 철학이 통하는 동시대의 예술가들이라는 점, 둘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정적인 미치광이 예술가들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기인의 만남이 필연적이라는 주장은 여러면에서 일리가 있다. 보이즈는 그때까지 어떤 상업적 화랑에서도 전시를 가진 적이 없었으며 그러면서도 유명세를 떨치는 기인이었다. 당시 뒤셀도르프의 유명화랑주인이며 백남준에게 바이올린 퍼포먼스를 제안하였던 장 피에르 빌헬름은 보이즈를 일컬어 “저런 기인이 대학교수가 될수 있다니 독일은 참 좋은 나라다”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보이즈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보이즈는 ‘죽은 토끼에게 예술을 가르치기’란 퍼포먼스에서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산 사람에게 하듯 그림을 일일이, 그리고 간곡히 설명해주었고 사람들은 창 밖에서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이다. 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화랑에서 열린 첫 비디오예술의 기원을 알리는 전시에서 백남준은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격렬한 퍼포먼스를 기획해놓고 있었다. 즉 피아노 한 대를 신나게 때려부술 생각이었다.

파르나스 화랑주인 롤프 예를링은 백남준의 부탁으로 화랑 근처에 생산공장을 갖고 있던 이바하(IBACH)피아노회사로부터 이미 고물 피아노 한대를 얻어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개막식이 거의 절정에 달했을 무렵, 갑자기 피아노가 있던 옆방에서 난리가 났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보이즈가 어디선가 도끼를 들고 나타나 백남준이 때려부술 피아노를 신나게 해치우고 있었다. 사전에 알았다는 듯이 ,또 사전에 모의라도 한 것처럼.

만약 이 피아노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 보이즈가 최초로 피아노에 손을 댄 오브제 작품으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남준과 화랑주인은 이바하피아노 측에 박살난 피아노조각을 사과의 말을 한뒤 돌려주었고 이바하피아노 측은 이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백남준은 이 사건을 “선견지명이 없어 수백만불짜리 작품을 버렸다”고 후회한 적이 있다. 이날 퍼포먼스는 보이즈에 의해 대행된 셈이다.

백남준과 보이즈는 그후에도 여러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관여되어 있다. 보이즈는 2차대전중 독일의 조종사로 전투에 참여한 기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비행기가 구소련의 크리미아반도에 추락하여 타타르족에 구조되기까지의 극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보이즈신화의 결정판이다.

백남준은 보이즈와 자신과의 관계를 가끔 불가사의한 것으로 보았으나 실은 보이즈의 적극적인 호의로 판단한다.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둘 사이의 예술적 힘을 수치로 비교한 백남준의 글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주위에서 보이즈가 백남준을 의도적으로 감싸고 돌봐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주위의 속물들이 어떻게 떠들지언정 그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에는 1%의 차이도 없다. 이것은 쉬운 듯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다망한 것도 육체의 한계가 있다. 아무리 호의가 있어도 시간이 없으면 그만이다. 친구가 장관이라 해도 장관면회 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보이즈는 72년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의 교수직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학생들의 학교교무실 점령사건에 보이즈가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였고 보이즈는 당시 독일의 라우 총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대학의 학장이 백남준에게 교수자리를 제안해온 것이었다.

백남준은 독일 최고의 미술대학에서 교수자리를 제안받았다는 사실에는 매우 흥분하였으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쫓겨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백남준은 너무나 가난한 예술가였고 보이즈는 그야말로 붓대만 제대로 내두른다면 몇만불은 들어오는 경제대가가 되어있었다. 고민끝에 백남준은 보이즈를 찾았다. 반 학기씩 교대하며 가르치자는 제안을 내보았다. 보이즈는 “그대의 제의는 고마우나 바쁘기도 하거니와 흥미도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물론 예측하였던 답이었지만 백남준에게는 그 자리를 수락하는데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응할 수 있었다.

86년, 백남준은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로부터 프로젝트를 제안받고난 뒤 보이즈와 함께 신나는 굿을 계획했다. 타타르족과 관련하여 평소 만주 몽골지방의 무속신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보이즈는 백남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백남준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기마민족의 드높은 기상을 굿이라는 형식을 빌어 한 판 놀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뜻은 보이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이즈의 이른 죽음에 대하여 백남준은 그의 진지함이 생명을 재촉하였다고 생각한다. “5분마다 전화가 온다. 돈달라는 놈, 강연회에 와달라는 놈, 전시개막식에 와달라는 놈, 공짜사인 해달라는 놈, 성공자의 그늘에서 혜택을 나누어 가지려는 욕망의 실체들 앞에 보이즈가 즐겨 행한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전화받는 일이었다. 전화에 일일이 응답해 주는 철학을 가졌기 때문이다. 패전국에다 갑자기 경제대국이 되어버린 불안한 독일사회에 누군가는 인간의 소리를 전달하는 아저씨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보이즈였다. 보이즈는 이러한 인간들에 짓눌려 생매장되었다.”

이용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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