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만의 오붓한 만남은 선배 박경리가 후배 박완서의 새집을 찾아 이뤄졌다. 교유한 세월이 30여년이지만 박경리가 박완서의 집을 찾기는 5년만이고 그것도 이번이 두번째. 박완서는 지난해 서울의 아파트생활을 정리하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으로 이사했다. 박경리는 마중나온 박완서의 손을 맞잡으며 “이번이 아니면 정말 다시는 못 올 것 같아서…”라며 반가워 했다.
‘이번’이라는 단서, 박경리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지난 3년간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이 완공돼 9일 개관식이 열린다. 그는 이날을 계기로 “이기주의자로 변신을 선언하겠다”고 말했다.》
▽박경리〓이젠 정말 글 쓰고 뒷산 가꾸는 일에만 몰두할 거요. 소설 쓸 때는 그렇게 지긋지긋하고 끔찍하더니 ‘토지문화관’일에 휩쓸려 세상사에 시달려 보니까 새벽에 뻐꾸기 소리 들으며 글쓰던 시절이 너무 그리워.책상앞으로 돌아가야지.거기밖엔 살아갈 길이 없어요.
▽박완서〓저는 이기주의라고는 차마 말 못하고 늘 “나는 개인주의자예요”라면서 번잡스러운 일들을 피해왔어요(웃음). 서울을 떠나 이 곳으로 온 뒤에 저도 정신적으로 많이 건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봄 산에 새순 돋는 것, 그만큼 황홀한 광경이 있을까요.
‘토지문화관’ 이사를 맡은 박완서와 이사장인 박경리. 두사람에게 이 새 문화공간은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공통의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완〓처음에는 그 큰 공간을 보면서 ‘아휴, 이걸 어떻게 하나’ 했는데 완공된 모습을 보니 이런저런 구상이 막 떠올라요. 저는 토지문화관이 자연과 어우러진 것처럼 문학 미술 음악 영상 만화 무엇이든 넘나들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 됐으면 해요.
▽경〓나도 분야를 막론하고 ‘사는 데 관계되는 것’은 이 곳에서 다 해보자’고 생각해요. 문화 정치 경제 무엇이든 현안을 놓고 토론하는 공간은 어떻겠어요. 전문가들이 때로는 멱살잡이까지 해가며 결론에 이를 때까지 몇날 며칠이라도 토론하는 공간이 돼야겠지요.
▽완〓너무 문학에 경도돼서 운영되지 않길 바랍니다. 소설 ‘토지’ 때문에 생긴 공간이니 문학에 한정해 이용하자고 든다면 고시촌 밖에 더 되겠어요.
▽경〓나는 문화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와야 미래공간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박경리의 마음은 이미 ‘토지문화관’에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있다. 요즘 그는 돋보기로 일어사전을 들추며 ‘토지’ 일어번역에 몰두한다. ‘토지’1부 2백자 원고지 6백장 분량을 한 달만에 일어로 옮겼다. 극일(克日)을 위한 ‘일본론’도 이제부터 써야할 큰 주제.
박완서는 가까운 지인들조차 그가 곧 칠순을 맞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게 만든다.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 그의 시선과 필치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펴낸 작품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창작과비평사)은 노경(老境)의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해낸 작품으로 호평을 얻고 있다.
▽완〓저는 절필도, 노(老)대가도 싫어요. 그냥 죽는 날까지 현역이고 싶습니다.
▽경〓몸은 늙어도 글에는 늙은 흔적이 나타나면 안되는 거지. 치열하게 쓰려면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돼요. 치열한 것, 그건 삶의 능동성이고 모든 생명의 본질이예요.
90년대 문학, 특히 여성소설가들에 대한 비판적 논평들에 대해 두 작가는 ‘작품이 말하게 해야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완〓여자작가가 많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참여하는 남녀숫자가 비슷해진 거겠죠. 90년대 문학 위기론을 얘기하지만 그건 남녀를 불문하고 공통된 현상 아닌가요. 어느 시대에나 가볍게 소비되는 작품과 시대를 거치며 걸러지는 작품은 공존해 왔어요. 저는 뭐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경〓창조사회에서는 남녀 구별이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들어내는 물건을 갖고 평가해야죠.
대쪽같은 두 작가. 그러나 손자들에 관한한 두 사람은 보통의 ‘할머니’였다. 손자 둘을 둔 박경리는 집 안 곳곳에 여섯손자의 사진액자를 놓아둔 박완서를 표나게 부러워했다. 그리곤 지나가듯 말했다.
“갓난아기일 때 업고 있으면 허리가 아프면서도 하루하루 몸무게 불어나는게 얼마나 신통하든지. 할미가 돼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요.”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