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이남호/「지상에 숟가락 하나」

  • 입력 1999년 6월 11일 19시 36분


현기영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는, 저자가 태어난 날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의 성장체험을 다룬 소설이다. 저자는 1941년 제주도의 함박이굴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8·15해방 직전부터 6·25전쟁 몇 년 후까지의 고통스런 민중적 삶이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가 살았던 곳은 아주 궁벽진 곳이었지만, 우리 비극적 현대사의 발톱이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간 자리였다. 한편으로는 전근대적 삶의 양식이 비교적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한 개인적 삶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개인적 기록과 시대적 기록은 풍성한 체험의 구체성 속에서 하나가 된다.

어떤 작품이 시대의 기록일 경우, 가장 위험한 것은 이념적 단순성이다. 그리고 어떤 작품이 개인의 기록일 경우, 가장 위험한 것은 체험의 상투성이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이러한 두 가지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롭고 아름다운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헐벗고 고통스런 세월이었지만, 그 세월은 한 작가의 섬세한 감성에 의해서 참으로 기억해둘만한 아름다운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은, 유년체험을 소재로 한 여타의 많은 작품들과 이 작품을 변별시켜준다.

이 책을 펴낸 실천문학사는 민중문학을 표방하는 출판사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온 책들은 대개 이념적 편향성이 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이념적 단순성을 훌쩍 뛰어 넘는 풍요로운 문학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민중문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좋은 작품이지만, 그런 관점이 아니라도 좋은 작품이다.

이남호<고겨대교수·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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