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입력 1999년 6월 18일 19시 27분


공간은 쉽게 볼 수 있고 시간은 쉽게 볼 수 없다. 나에게 이 말의 의미를 깨우쳐준 책이 몇 권 있다.

어릴 때 나의 우주는 내 방이었다.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나는 이 공간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방의 역사(시간)는 한 눈에 볼 수 없었고,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나는 퍼거슨의 ‘음악사상사’를 읽었다. 이 책 덕분으로 나는 서로 다른 많은 피아노가 전시되고 있는 악기박물관을 만난다. 피아노 하나하나를 따로 떼내어 본다. 18세기의 피아노가 있고 19세기의 피아노도 있다. 독일산 피아노와 영국산 피아노도 있다. 18세기 19세기라고 하면 시간개념, 독일 영국하면 공간개념이다. 박물관이 보여주는 피아노들은 오늘날 우리가 피아노라고 생각하는, 그런 피아노는 아니었다. 모두가 서로 달랐다.

피아노는 공간 속에서도 존재하지만 시간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의 발견은 나에게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시간 속에서의 존재는 ‘같은 피아노’가 아닌, 발전하고 변화하는,‘다른 피아노’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공간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시간은 쉽게 볼 수 없다는 사실에의 인식이었고, 역사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특정 공간 안에서만 산 예술과 모든 시 공간 안에 살고 있는 예술은 그 성격이 다르다. 자신의 공간만을 공간으로 생각하면서 그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예술만을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간만 보았지 시간을 보지 못한 탓이다. 예술을 먼 옛날에서부터 오늘로 이어지는 기나긴 시간 속에 풀어놓고 보는 눈, 이런 눈을 나는 예술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깬 눈’이라고 생각한다. 퍼거슨의 ‘음악사상사’는 이 눈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주었다.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역시 또다른 차원에서 예술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는 명저라는 생각이다. 대학시절 처음 영문으로 읽었을 때에도, 지금 읽어도 새로운 감명을 주는 책이다.

예술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저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이다. 유학 중 읽기 시작해 귀국 후에도 이 책을 읽으며 예술과 관련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을 받았다.

내게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공간과 시간 모두를 쉽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을 때 삶이 더 풍요로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강숙<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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