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생명이 운보 김기창화백의 그림 203점을 60억원에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평균하면 한 점당 2950만원선.
그림값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그림값 결정과정을 비판하는 이색 기획전이 열리고 있어 화제다.
이달초 서울 인사동에 개관한 종로아트(02―733―2033)가 7월1일까지 열고 있는 ‘너희가 그림값을 아느냐?―호당가 문제제기를 위한 제언전’.
강기태 강수돌 등 40대를 중심으로 한 43명의 작가가 1인당 6호와 20호짜리 그림 두 점씩 총 86점을 전시회에 내놨다. 작품 가격은 미리 정했다. 6호는 100만원, 20호는 40만원. 종로아트 박정수관장은 “큰 그림이 비싸고 작은 그림이 싸다는 생각을 비판하기 위해 값을 거꾸로 매겼다. 예술품의 가격을 크기로 결정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술품 가격은 대개 작가가 먼저 값을 부른다. 경력과 연령, 시장에서의 평판, 또래 작가의 가격 수준 등을 고려해 호당가격으로 작품값을 매긴다. 원로 K화백과 또다른 K화백은 호당 7백만원을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고한 P화백의 경우 판매자가 호당 1억원을 요구한 적도 있다는 것. 그러나 미술시장에서는 작가가 부른 값인 ‘호가’와 실제 거래가 이루어지는 값인 ‘시가’로 나뉘어 이중 가격구조가 형성돼 있다.
이같은 호당가격제의 폐단은 그림값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만든다는 것. 호당 100만원을 요구하는 작가라면 10호짜리 그림은 1000만원이지만 100호짜리 그림은 1억원. 크기가 10배여서 가격도 10배인 것. 그러나 예술성에서도 10배의 차이가 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 호당가격제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큰 작품일수록 작가가 부르는 값과 구입자가 지불하려는 가격 사이의 차이가 크다. 이 때 화랑이 개입한다. 화랑과 작가는 경우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대개 4대6 정도의 비율로 작품 판매대금을 나눠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은 고가의 그림을 팔 경우 자신의 마진을 줄여서라도 작품을 파는 쪽이 유리하다. 따라서 많은 경우 값을 깎아준다는 것.
화랑계의 한 관계자는 “미술품 면적으로 값을 계산하는 호당가격제는 조각품을 무게로 달아 파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폐지를 주장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호당가격제의 불합리성에 대한 의견이 많아 젊은 작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미 호당가격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한 작품가격을 공개석상에서 결정하는 미술품경매제도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원로작가 작품의 경우 기존 거래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다 일반인에게도 ‘큰 작품은 비싸고 작은 작품은 싸다’는 인식이 깊어 호당가격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미술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림 호수의 유래 ■
현재 국내에서 통용되는 호수(號數)는 0호부터 500호까지 24가지가 있다.
0호는 18×14㎝이다. 1호부터는 같은 호수라도 크기가 세가지로 나뉜다. 인물형(F형) 풍경형(P형) 해경형(海景型·M형)이 그 것.
이같은 구분은 그리는 대상에 따라 캔버스의 크기를 다양하게 만들 필요때문에 생겼으며 관행으로 크기가 굳어졌다.
1호 인물형은 22.7×15.8㎝ 풍경형은 22.7×14.0㎝ 해경형은 22.7×12.0㎝이다. 가로 세로 어느쪽이든 긴쪽의 길이가 기준이 된다.
2호 인물형은 25.8×17.9㎝ 풍경형은 25.8×16.0㎝ 해경형은 25.8×14.0㎝이다.
이에 따르면 2호 해경형은 1호 인물형보다 불과 2.5㎠ 더 클 뿐이다. 호당가격제에서는 이같이 불과 몇 ㎠ 차이에 따라 몇백만원씩 작품가격 차이가 난다.
호수의 유래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7,8세기 유럽에서 그림이 대량으로 그려질 때 캔버스 대량생산을 위해 캔버스크기를 규격화했다는 것. 이때 당시의 엽서크기를 기준으로 만들었다는 설명. 또는 일본에서 개화기에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 나름대로 작품크기를 재는 기준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명이 있다. 화랑협회 권상능회장은 “일제시대부터 국내에서도 호수를 적용했다. 그러나 호수로 그림크기를 재는 방식은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60년대말과 70년대를 거치면서 정착됐다”고 말했다.
종로아트 박정수관장은 “외국에서는 호수를 작품크기를 재는 방식으로 사용할 뿐 작품가격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원홍기자〉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