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부정부패]신라 김춘추 뇌물주고 고구려 탈출

  • 입력 1999년 6월 29일 19시 30분


서기 642년 병력지원 요청을 위해 고구려에 갔다 감금된 신라의 김춘추. 그는 고구려 보장왕의 한 측근에게 청포(靑布) 300보(步)를 주고 고구려를 탈출했다. 뇌물을 주고 목숨을 건진 것이다.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뇌물의 역사.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부정부패는 뇌물수수와 관료들의 부정 축재였다. 부정축재는 관료들이 백성의 노동력과 세금을 착취해 개인의 치부에 이용한 경우가 대부분. 물론 당시에도 귀양과 같은 엄격한 처벌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 등을 보면 뇌물을 받은 사람은 엄하게 벌했지만 뇌물을 준 사람은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부정부패는 주로 권력형 부정축재. 외척 문벌가였던 이자겸이 대표적이다. 그는 딸 셋을 왕비로 만들 만큼 권력을 탐했던 인물이다.

‘이자겸의 집에는 뇌물성 선물이 줄을 이어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근에 달했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엔 부정부패 처벌이 비교적 엄정했다. 관리가 업무와 관계없이 ‘순수한’ 떡값을 받아도 처벌 대상이었다. 공짜로 남의 말(馬)을 빌려써도 곤장 100대의 벌을 받아야 했다.

조선 중기 16세기 들어서는 권력형 비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권력에 접근한 층들은 군역(軍役)과 세금 부담에서 빠져나갔다. 힘없는 양민들만 군대에 가고 세금을 낸 것이다.

권문세가는 지방 수령과 결탁해 토지를 불법으로 사유화했다.

부정부패가 심화된 때는 17세기말.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개인적 부정부패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당파 차원의 정치자금 조달도 횡행했다.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서자 안동김씨와 같은 외척 권문세가에서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권력형 부정축재는 일상사가 돼버렸다. 지방 관리들이 권력층에 뇌물을 상납하는 일은 하나의 관례였다.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유통을 통한 부정축재가 만연한 것도 이 시기 부정부패의 한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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