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샬로트 무어만과의 만남

  • 입력 1999년 7월 15일 18시 44분


'오페라 섹스 …'의 무어만
'오페라 섹스 …'의 무어만
누구나 살면서 그러하겠지만, 특히 백남준의 삶에서 사람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전환에 중요한 동기가 되어왔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초창기 한국에서의 음악인생이 그러하였고 독일에서 조셉 보이즈와의 만남, 존 케이지와의 만남은 그의 삶에서 가히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소개하는 샬로트 무어만과의 만남은 비디오예술과 퍼포먼스, 그리고 음악과의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백남준의 미국정착을 가능케 한 인연으로 작용했다.

백남준은 63년 독일에서의 첫 비디오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텔레비전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연구를 위하여, 또 가족에게서 생활비도 얻을 겸 일본으로 잠시 건너갔다. 이 여행은 텔레비전에 관한 기술연구를 일본에서 해보라는 형 남일씨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백남준은 이 여행에서 향후 비디오 기술개발에 결정적 동반자가 되는 전자기술자 슈야 아베를 만나 그와 전자 로봇 ‘K456’을 만들어냈다.

64년 6월, 미국 뉴욕에서는 제2회 뉴욕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이 전위음악가이자 플럭서스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만의 주도로 준비되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나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수석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케이지의 권유로 뉴욕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조직하는 등 매우 실험적인 음악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무어만은 이 페스티벌에서 독일의 슈톡하우젠이 작곡한 ‘괴짜들(Die Originale)’을 공연한 계획이었다.

‘괴짜들’은 64년초 이미 독일에서 공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백남준은 이 공연에서 동양에서 온 격렬한 문화테러리스트 겸 시인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슈톡하우젠이 백남준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 대본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뉴욕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무어만은 막상 이 공연을 앞두고 동양에서 온 괴물예술가 역할을 해낼 인물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케이지가 백남준이 일본 도쿄에서 뉴욕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을 무어만에게 귀뜸해주었다. 게다가 무어만이 슈톡하우젠에게 미치광이 행위예술가 역할을 한 사람을 천거해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슈톡하우젠은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백남준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백남준이 케네디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마중나온 사람은 무어만이었다. 무어만은 백남준이 이 역할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 셈으로 공항까지 마중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공항에서 맨하탄으로 들어오는 자리부터 공연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백남준은 뉴욕에 머무는 동안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하여 미인의 청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뉴욕아방가르드 페스티벌 공연에서 백남준은 머리에 면도용 크림과 쌀을 붓고 중국 족자를 뜯어 내리며 물통에 머리를 처박고 피아노를 치는 등의 괴상한 행위작업을 펼쳤다. 그리고는 구두를 벗어 물을 담아 마시는 행동을 반복하였다. 또 도쿄에서 슈야 아베와 합작한, 걸어다니며 말하는 로봇‘K456’도 등장시켰다. 이 로봇은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취임사를 읊고 돌아다니며 관객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말하자면 무어만의 마음에 쏙 들도록 단단히 한 건 해준 셈이었다.

백남준은 ‘괴짜들’을 멋지게 공연한 뒤 당시 뉴욕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던 팝아트의 물결을 응시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었다. 한달 정도 머물다가 독일로 돌아가려던 백남준의 생각은 뉴욕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성공과 뉴욕미술계의 분위기에 이끌려 아예 뉴욕에서 작품을 새로 시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케이지가있고 플럭서스의 동지인 조지 마치우나스, 알란 카프로우, 조지 브레히트, 벤자민 패터슨,앨리슨 노울즈 등독일에서만났던 친구들이 그의 뉴욕 정착을 적극돕고 나섰다. 무어만은 헌신적이고도열정적인도움으로 백남준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필자를 포함하여,백남준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여성과 백남준의 관계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궁금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러한 궁금증은 남녀관계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여 어떤 경로를 통해 환상적인 예술적 동반자가 될 수 있었는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문의 띠로 이어진다.

이들은 관념적 예술형식을 버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예술의 이름으로 시도하였으며 신체적인 밀착공연을 벌인 것은 물론 심지어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등 스캔들도 일으켰다.

백남준은 무어만에게 음악과 섹스를 연결시킬 수 있는 퍼포먼스를 제안하였다. 문학과 미술이 언제가 자유롭게 섹스를 주제로 다루어왔고 섹스는 언제나 예술과 중요한 함수관계에 있다고 생각한 백남준은 유독 음악만이 섹스 주제를 금기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곤 하였다. 이러한 반증으로 백남준은 ‘음악이 다른 예술장르보다 50년은 뒤떨어져 있다’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심지어 백남준은 발가벗은 여인이 월광소나타를 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연상하면서 섹스 주제의 오페라를 쓰고 싶은 충동까지 느겼다.

백남준의 엉뚱하고도 전위적인 사고를 알아차린 무어만은 어느날 드디어 백남준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백남준이 작곡한 ‘생상스를 위한 변주곡’에서 무어만은 잠옷을 입은채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속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였다. 또 알몸을 투명 플라스틱으로 감싸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에서도 섹스 주제의 퍼포먼스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후에 무어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글을 썼다.

“나는 이 작업을 즐겼다. 나는 전갈좌이고 물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이 일생을 통하여 단 한번 점잖게 차려입었던 67년2월, 무어만과 공연한 ‘오페라 섹스 일렉트로니크’는 음악과 섹스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의 하이라이트였으며 이 공연은 많은 화제를 뿌렸다. 무어만은 첫 무대에서 바늘이 주렁주렁 달린 비키니를 입고 첼로를 연주하였으며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였다. 이 공연의 3장 ‘아리아’에서는 하반신을 벗은 채 머리에는 헬멧을, 상체에는 축구선수 유니폼을 입었다. 4장에서는 완전히 옷을 벗고 첼로를 연주하였다.

이 공연은 뉴욕의 45번가에 있는 영화제작자극장에서 실연되었으며 불행하게도 공연 도중 경찰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이들은 체포되었으나 그 다음날 풀려났다. 이 공연과정 및 외설여부에 대한 시비가 뉴욕의 법정으로 옮겨져 재판이 시작되었다. 예술의 이름으로 공연하더라도 외설은 외설이라는 당국의 입장과 예술의 표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뉴욕예술계는 예술과 외설시비에 대한 차별성 및 예술적 표현자유의 확보를 위하여 이들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결과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외설과 예술의 표현자유는 다르다는 최종판경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이들이 재판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여 주신다면 5000달러를 주겠소.”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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