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TV부처]물질과 정신의 이질적 만남

  • 입력 1999년 7월 29일 19시 36분


백남준 비디오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 가운데 예술성이나 미학적 근거에서 늘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 바로 ‘TV부처’이다. 외견상 부처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TV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작품이다.

소재는 부처와 텔레비전모니터, 폐쇄회로 카메라, 그리고 부처를 올려놓은 보조대가 고작이다.

그런데 가만히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 작품에는 동양과 서양, 과학기술과 명상의 세계, 인간화된 예술, 카타르시스, 아이러니, 알레고리 등 수많은 미학적 요소는 물론 테크놀러지예술이 가져야 할 다양한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의 미술전문가들에게 더욱 평가받는다. 그들의 평에 따르면 백남준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TV부처’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엮어보자.

‘TV부처’는 비디오의 폐쇄회로를 이용한 매우 간단한 싱글채널 방식의 설치작품이다. 모니터 뒤편에 비디오카메라가 장치되어 있다.

카메라는 부처를 비추고 있으며 부처는 카메라 앞에 앉아 자신의 영상이 나타나는 텔레비전을 응시하며 회상에 젖어 있는 듯 하다.

동양종교와 명상의 상징인 부처는 20세기 테크놀러지의 총아인 텔레비전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서로가 갖는 이질성과 담론을 나눈다. 테크놀러지의 상징인 TV는 기술문화가 갖는 온갖 회의적이고 소란스러운 자기 존재론적 질문을 부처님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명상의 상징인 부처까지도 과학기술시대 이미지문화의 도구인 카메라에 사냥되어, 일종의 이미지의 덫에 걸린 채 자기확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부처는 과학기술에 의해 나포되어 자기이미지에 대한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빠져나올 기색이 없으며, 차가운 과학기술의 단점을 잘 알고 있는 텔레비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부처를 놓아줄 것 같지 않다.

말하자면 과학기술을 모태로 한 문명사회는 상실한 전통과 명상의 세계를 열렬히 요구하고 있고, 한편 전통과 사색은 기술시대 이미지문화가 갖는 매력에 도취되어 처음으로 자기거울보기에 여념이 없다. 이 둘 사이의 랑데부를 통한 영원한 향수는 절대적인 짝을 이루어 서로 자기정체성 확인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서구에서 개발되었고 사유의 세계는 동양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이 작품은 이러한 양 대륙의 조화를 넉넉하게 보조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멀티미디어와 영상예술 등 테크노아트의 천국에서 과학기술이 어떻게 인간화된 예술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주는 작품인 것이다.

‘TV부처’는 68년 백남준이 미국 뉴욕의 보니노화랑에서 가진 네번째 개인전에 처음으로 출품되었다. 원래 백남준은 전시장 천정에 텔레비전 모니터를 가득 매달고 불을 끈 뒤 흡사 하늘에 물고기가 가득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TV물고기’를 연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시 개막 며칠전까지도 텔레비전을 필요한 만큼 구할 수가 없었다. 절망감에 젖어있던 백남준은 부지런히 대용작품을 찾았다. 길을 가다가 거의 공짜로 구해놓았던 부처가 생각났다. 원래 연출하려던 ‘TV물고기’만은 못하겠지만 그 넓은 공간을 비워놓기 보다는 부처님이라도 모셔놓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처음에는 부처를 텔레비전을 보는 단순한 관객으로 등장시킬 예정이었으나 부처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기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카메라에 사로잡힌 이미지로 연출하였다.

그리고 카메라가 사냥하는 리얼타임을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우주 속에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이른바 아인슈타인의 질량불변의 법칙을 토대로 백남준의 텔레비전 부처는 태어났다.

‘TV부처’는 이 전시회에서 받은 놀라운 호평에 힘입어 70, 80년대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되거나 재구성되어 전시에 출품되었다. 가령 83년 독일 베를린의 데아아데(DAAD)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는 부처가 돌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82년 미국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는 흙 속에 묻혀있는 부처의 모습이 공개되었다.

즉 부처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 있는가의 문제가 작품의 다양한 공간환경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읽히게 하였다.

커다란 흙더미 속에 모니터를 묻어놓고 카메라가 부처를 비치는 순간 부처의 이미지는 대지 속의 조그만 눈처럼 보인다.

대지 속의 눈으로 나타난 부처는 진정한 지혜의 상징처럼 보이며 텔레비전은 단순히 부처의 영험함을 입증하는 도구로 쓰인다. 기계문명이 기능적 역할로만 대치되었으며 부처의 이미지는 고고한 이미지를 다시 찾았다.

TV부처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백남준은 폐쇄회로를 이용한 또다른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이번에는 부처 대신 서양의 명상적 상징인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아 ‘TV로댕’을 제작하였다. 부처가 동양적 명상을 상징한다면 서양적 명상의 상징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데 착상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텔레비전에 올라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이 조각의 사색은 더이상 로댕이 부여하였던 총체적 사색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놓고 벌이는 사색, 즉 기계문화와 대중문화, 상업자본주의와 광고, 편집된 정보와 자연적 정보 등 텔레비전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오늘날 텔레비전 환경을 총체적으로 고민하는 주제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백남준이 부여한 또다른 사색이며 20세기 전자환경 속으로 환속한 ‘텔레비전 로댕’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술가들은 다수가 예기치 않게 시작한 작품으로 걸작을 낳은 경험을 갖고 있다. 만약 백남준에게 보니노화랑 전시 당시에 충분한 텔레비전이 제공되었다면 아마도 ‘TV부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많은 예술가들이 가난과 싸우면서 어렵게 제작한 곤고하던 시절의 작품이 훗날에 걸작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술도 안일하게 정복하려는 일체의 도전에 대하여 강력한 자기제어장치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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