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소설가 박상우(41)가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서 그려내는 90년대 말의 모습이다.
9년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 작가는 80년대의 정치적 허무주의 때문에 괴로워하는 군상을 그려내고 낭만적 문체로 그 아픔을 어루만졌다. 그가 바라본 90년대말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물신화(物神化), 파편화되고 개인들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암울한 세계다.
단편 ‘사탄…’이 시작되는 무대는 어둑한 록카페. 한 테이블에 앉은 여덟명은 눈짓과 메모지로 단편적인 대화를 나누고, 일행이 된다. 한 사내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뭉크 풍의 그림이 곳곳을 수놓은 화실 ‘카타콤’으로 향한다. 촛불이 꺼졌다 켜진 순간, 일행 중 한 여인이 음독한 상태로 발견된다. 여인의 친구가 도움을 청하지만 눈을 뜨고 앉아있는 남자마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Ω(오메가)’자 모양의 티셔츠를 입은 사내. 그가 암시하는 메시지는 ‘종말’이다.
“앞서 ‘샤갈…’마지막에서 한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다른 이의 손을 잡는다. 그것은 깨어져나가는 공동체를 거머쥐려 애쓰는 손짓이었다. 그러나 이제 개인들은 옆사람의 죽음에조차 눈길을 주지 않는 냉소적 인간상으로 바뀌었다.”
박상우는 물질에 의해 인간사이의 교감이 박탈된 오늘날은 악마적이며 또한 세기말적인 시대라고 못박는다.
제목부터 ‘샤갈…’와 대칭을 이루듯, ‘사탄…’에는 ‘샤갈…’과의 수많은 연결고리가 등장한다. 지하공간의 주인은 “예전에 샤갈을 좋아했다”고 밝혀 ‘샤갈…’에 등장했던 공간과의 연계성을 암시한다. 피를 흘리며 절규하는 뭉크 풍의 악마적 그림은 샤갈 그림의 동화적 세계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작가는 이 작품이 자신의 2000년대 작품 특징을 이룰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90년대 작가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까지 써온 작품들은 80년대에 이미 쓰려고 마음먹었던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90년대에 마주친 파편화된 인간상, 새로운 양상의 인간소외를 하나씩 소설로 드러낼 것이다.”
그는 ‘사탄…’에서 그랬듯이 앞으로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문체를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상적이고 흐트러진 개인 사이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문장에 속도감을 주고, 사람 사이의 내면적 교류나 정감이 빠져나간 공허 속에 독자의 객관적인 관찰을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다.
“힘들고 버거웠던 80년대의 주제들을 정리해 홀가분하다. 이제는 내 맨몸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시기다. 박상우 문학의 2기를 지켜보아도 좋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