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귀신이고 개나 말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은 가장 그리기 어렵다.”
중국의 사상가인 한비자(기원전 약 280∼233)는 이렇게 주장했다. 개나 말은 사람들이 그 형태를 잘 알고 있지만 귀신은 본 사람이 없으므로 닮게그렸는지아닌지 알 수 없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필진 중 한명인 베이징고궁박물원 부원장 양신(楊新)은 이 말이 초기 중국회화가 추구한 사실정신을 반영했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생각을 그려낸다’는 점을 중시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볼 때는 구체적인 대상을 닮게 그리는 것보다 화가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미지와 사상의 요점을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이같은 점은 북송(960∼1127)시대들어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문인들은 그림속에 시(詩)를 적어넣었다. 당시 문인들은 시를 통해 마음속에 품고 있으나 표현하기 어려운 점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려했다. 시와 그림을 연결해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또다른 필자인 예일대 미술사교수 리처드 반하트는 그동안 동양미술계에서 문인화를 보다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 사실묘사에 치중한 직업화가들의 작품에도 균형있는 평가를 내리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기원전 1만년 가량의 신석기 유적에서부터 20세기 작가에 이르기까지 중국회화사 전반을 다룬 노작(勞作). 정신적인 표현,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두줄기 큰 흐름을 볼 수 있다.
서양미술계에서 출발한 미술사연구가 동양에 도입된 시기는 얼마되지 않는다. 중국회화사는 장대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드물었기 때문에 이 책은 더욱 의의를 갖는다. 중국 베이징의 대외출판집단과 미국 예일대학출판부, 미국학술단체 협의회가 공동으로 97년 펴낸 책을 서울대 동양화과 정형민교수가 번역했다. 정교수는 1년여에 걸쳐 번역 작업을 한 뒤 병원에 다녀올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300여점에 이르는 원색도판을 실어 제작비가 1억원대에 달했다고 출판사측은 설명. 예일대측은 색판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국내번역판도 홍콩에서 인쇄할 것을 요구하는 등 까다롭게 굴었다는 후문이다.
〈이원홍기자〉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