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서동욱 첫 시집 ‘랭보가…’/숨은 권력 까발리기

  • 입력 1999년 9월 3일 19시 04분


불모성(不毛性)또는 종말. 서동욱의 시를 그렇게 정의할 수 있을까.

첫 시집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문학동네)을 통해 보여준 그의 세계는 그로테스크하다. 태아들은 수술실에서 ‘흐물흐물 부서지고’누이들은 ‘지난 여름 실종된 시체’가 된다. 인간들은 물체가 되어 살과 뼈로 힘없이 해체된다. 무엇이 그의 세계를 그처럼 황량하게 만드는 것일까.

여덟 편의 ‘X혹은 신체적 형벌’연작에서 주인공은 가려움증에, 눈의 진물에, 혹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된다.

▼'X연작'서 은유적 고발▼

‘뇌가 시려워 죽겠어요/의사는 뇌가 시려운 증상은 없다고 했다/백이면 백 환자들은 다 자기 증상을 다르게 묘사해요’(‘삐뚤어진 코뼈 혹은 X대에 올라’)

“X 연작에서 인물의 병은 사회적 억압 때문이다. 그럼에도 권력은 병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하며 그를 기만한다”고 서동욱은 말한다.

X로 상징되는 미지자(未知者). 그 권력의 실체는 표제작인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A흑 E백 I적 O청 U녹 나의 코드들. 그러나 A밑에 총칼이, E밑에 미쓰비시 사가, I밑에 아디다스 CM송 그 밑에 대포(…)내 몸을 하수인으로 삼은 무서운 집행자들! 모든 인식의 배후에 숨어 있는 알 수 없는 그들이 찬창을 열고 베를렌의 몸에도 총알을 장진했다….’

▼95년 시-평론등으로 등단▼

인식의 배후에 숨어 억압하는 권력. 그것은 시의 부제인 ‘다국적 기업의 정치경제’에 다름아니다. 그것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왜곡은, ‘온갖 감각에 다다를 수 있는 시언어를 창조하려던’랭보의 시도를 현대에 이르러 좌초시키고 있다.

시인은 95년 ‘세계의 문학’과 ‘상상’에 각각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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