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18)

  • 입력 1999년 9월 10일 18시 37분


소금은 아침 나절에 조금 먹어 두었으니까 점심 때처럼 일점 오 리터짜리 음료수 병에 담아 두었던 물을 사발에 부어서 입 안에서 씹듯이 굴리면서 천천히 마신다. 모두 세 사발쯤 마시고나면 허기가 서서히 사라진다.

머리맡의 형광등은 낡을대로 낡아서 양쪽 모서리에 검은 흔적이 번져 있고 보통 때에는 들리지도 않았던 지잉, 하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깊은 밤중에 잠을 못이루어 뒤척이다 보면 금속성의 소리가 아예 머릿골 속에서 긴 파장을 그으며 지나가는 것만 같다. 낮이나 밤이나 켜있는 형광등의 부연 빛이 소리로 변하여 대뇌를 점령해 버린다. 몸은 차츰 사라지고 의식만 명료하게 번뜩인다. 이것이 그 사흘에서 나흘까지의 하얀 백짓장 같은 경계선이다. 닷새 그리고 일주일로 접어 들면서 육체의 들끓는 요구 사항들은 단순하게 걸러지고 가라앉기 시작한다. 배설물도 끊기고 나중에는 하얀 물이 조금 나오다가 만다. 이맘때에는 모든 음식물의 냄새가 역해진다. 몸에서는 야릇하게 간장을 조리는 듯한 비릿비릿하고 콤콤한 젓갈 냄새가 나고 속옷이며 이부자리에도 깊숙히 배인다.

꿈을 꾼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넓고 푸른 풀밭이며 나무들이 보이던지. 먹방에서의 꿈처럼 나는 들길을 걷거나 아니면 그 위를 구름이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다. 보름이 지나면 누워 있는 게 아늑해지고 으실으실 추워지는데 약간의 오한마저도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와 이불을 쓰고 누워 있을 때처럼 쾌감이 생겨난다. 잠은 날이 갈수록 적어진다. 밤에도 간간히 깨어나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우두커니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노년처럼 추억이 많아진다. 잠 자리 위에 그냥 멀건히 앉아서 과거의 오솔길로 파고 들어간다.

어느 날에는 어린 아우가 찾아 온다. 옛날 내가 열 한 살이나 먹었을 무렵의 여름방학이 느닷없이 생각난다. 샛강으로 고기를 잡으러 가려고 동네 개구쟁이들과 고추장이며 냄비며 그릇을 챙겨 들고 삼태기 메고 막 떠나려는데 너댓 살 박이 아우가 자꾸만 따라온다. 아우를 돌보지 않으면 엄마에게 혼찌검이 나니까 금지 구역이던 샛강에 갔다는 비밀을 지켜야 하는데 꼬마는 미덥지가 않다. 나는 아우를 떼어 놓고 중도에서 달음박질을 친다. 멀리 달아나서 돌아보면 아우는 흙먼지 바닥에서 헹갈래를 치면서 울고 있다. 정신없이 강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놀다 돌아올 즈음하여 나는 저녁 노을을 보면서 그제사 아우의 울음 소리를 기억한다. 아! 가엾은 어린 아우. 언젠가는 시장통 극장에 서부영화가 들어와서 몰래 구경을 가려는데 아우가 따라온다. 떼어 놓으면 탄로가 나니까 하는 수 없이 손목을 잡고 시장통으로 나간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아우가 킹킹거리며 보채고 나는 옆 자리의 어른한테서 누깔사탕도 얻어 먹이고 사이다도 한 모금 마시게 하고. 아우는 사이다를 젖 빨듯이 오물거리며 먹고. 그래도 킹킹거리면 이제는 더 이상 짜증을 참지 못하고 손목을 질질 끌어다 매표구 앞에까지 데리고 나가서 집에 가라고 쫓아 버린다. 아우는 눈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울면서 시장통의 인파 사이로 사라진다. 어둑어둑 저물 녘에 영화가 다 끝나고 아까 그 장소, 매표구 앞에 서면 갑자기 인파 사이로 묻혀 버리던 아우의 작은 몸과 울음 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아우의 울음 소리는 지금도 너무 또렷하다. 집에 돌아가 보면 아우는 얼굴에 괭이를 그린채로 방의 안쪽 구석에 등을 돌리고 잠들어 있다. 잠든 아우의 쪼그린 오금과 발목이 통통하다. 그런데 언제나 필름은 매표소 앞에서 끝나고.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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