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뿌리가 껍질의 틈을 비집고 조심스레 생의 첫 무대, 흙속으로 뻗어나온다. 어찌나 기운이 센지 흙 부스러기가 들썩거린다. 그러나 조직은 연하디 연해 보인다…’
신생아가 첫 울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나무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산천은 의구(依舊)하다’는 자연관 때문에 사람이 그 생로병사에 무딘 것일 뿐….
고작 100년도 못 채우는 사람살이를 두고도 “책으로 쓰면 몇권”이라고 하는데 수백년 세월을 견디는 나무는 어떨 것인가.
이 책‘신갈나무 투쟁기’는 나무의 전기다. 주인공은 신갈나무지만 그만의 얘기는 아니다. 부부 산림학자인 저자들이 대학시절 이래 10여년간 눈과 발로 더듬은 한반도 숲의 생태 이야기를 신갈나무 주연의 드라마로 펼친다.
왜 신갈나무인가?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소나무 숭배로 인한 차별이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한반도의 우점종이 되었을 나무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신갈나무를 말하기 위해 먼저 “참나무는 없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도토리열매가 맺히는 나무, 좋은 목재를 낳는 참나무의 제대로된 이름이 신갈나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의인화기법은 “식물생태학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시큰둥해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나(식물)도 당신들 인간 만큼이나 고달픈 삶을 산다”는 식물쪽의 항변을 실감나게전하는효과도크다.
자식(종자)을 살리기 위해 모질게 쫓아보내야 하는 신갈나무 어미의 사연만 해도 그렇다. 어미의 그늘 아래에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것이 나무의 숙명.
식물의 어미들은 신갈나무처럼 자식을 도토리열매로 멀리 굴려 보내든가 민들레처럼 날개를 달아준다. 봉숭아처럼 터져서 튀어나가게 하거나 줄딸기처럼 짐승에게 먹혀 배설물로 운반되도록 하는 것도 있다. 그리하여 식물의 어미자식은 사람보다 더 멀리 헤어져 산다.
저자들은 신갈나무의 한살이를 풀어가며 ‘식물의 체온조절’ ‘나이테’ ‘곰팡이와의 공생’ 등을 별도의 상자글로 소개한다. 사진자료도 풍성해 다이제스트판 식물도감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신갈나무 투쟁기’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 주변의 식물들을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체감하게해준데 있다.
마침내 천수를 다하고 쓰러지는 나무.
‘신갈나무에게 진정한 휴식은 이제부터다. 어미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부터 한순간도 생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숨쉬는 것에서 양분을 모으고 물기를 가두고 양식을 만들고 잎을 피우고 잎을 떨어뜨리고 눈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고…. 살고 있는 동안은 잠시도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난 사람들은 이제 늙어 쓰러진 한그루 나무앞에서 정녕 경건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56쪽. 1만5000원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