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아내 구보타 ‘동료로… 연인으로…’

  • 입력 1999년 9월 16일 18시 22분


1963년 6월 어느 날, 작곡가 백남준이 퍼포먼스를 한다는 예고가 도쿄의 소게츠 회관앞에 나붙었다. 당시 일본에서 백남준의 명성은 미미하였지만 음악잡지를 통하여 간간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음악계 내부에선 그런 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예술계는 백남준을 온통 전위적인 젊은 작곡가, 또는 무정부주의 플럭서스 철학을 앞세우는 대책없는 예술가로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당시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그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의 말처럼 ‘어느 젊은 미치광이 작곡가의 발표회’ 정도로 이해된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이러한 배경에는 특히 백남준이 일본의 음악잡지 ‘음악예술’에 소개한 서구현대음악의 내용이 거의가 50∼60년대 유럽의 전위예술이었고 급진적 사고를 극렬하게 나타낸데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칼하인즈 슈톡하우젠의 오페라 ‘괴짜들’의 공연소식이 일본에 소개될 때 거기에 출현한 백남준이 가장 극렬한 동양예술인으로 묘사됐기 때문에 이미 악명이 높아져 있었다.

▼백남준 도쿄공연 떠들썩▼

그가 일본 전위예술의 상징적 무대인 소게츠 회관에서 퍼포먼스를 갖게 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소게츠 회관 측은 백남준이 잠시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에게 퍼포먼스를 제안하였고 백남준은 유럽에서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동경무대에 선보이고 싶은 욕망이 슬며시 생겼다.

니가타 출신으로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젊은 여성예술가 구보타 시게코는 음악을 하는 친구로부터 백남준의 이름을 익히 듣고 있었다. 또 구보타 자신도 플럭서스를 동경하며 언젠가는 플럭서스 멤버가 되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백남준의 도쿄 퍼포먼스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동경대학 출신의 젊은 엘리트에다 독일에서 젊은 나이에 그런 대로 명성을 얻었던 터라 그의 퍼포먼스는 예상외로 초만원이었다.

백남준은 이 퍼포먼스에서 그의 십팔번이 되어버린 ‘피아노 때려부수기’를 신나게 벌었고 머리에 먹물을 뒤집어 쓴 채 머리카락으로 글씨를 쓰는 등 독일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당시 일본은 전위예술에서 꽤 앞서가는 동네였지만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쇼킹한 것이었다.

아무튼 백남준이 벌인 퍼포먼스의 내용은 제쳐두고라도 관객들은 동경대학 출신의 젊은 예술가의 ‘홈 컴잉 이벤트’를 추켜세우며, 흡사 일본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를 환영하는 것처럼 이 퍼포먼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날 객석에서 백남준을 유심히 지켜보던 구보타 시게코는 남들보다 훨씬 강한 느낌을 받았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그것은 거의 연민에 가까운 것이었다. 퍼포먼스가 끝난 뒤에 백남준과 그의 옛 친구들이 함께 하는 조촐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구보타는 함께 간 친구에게 그 자리에 낄 수 있는 방법을 미리부터 제안하고 있었다. 지금은 백남준의 부인이 되었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자리는 사실 구보타가 그렇게 정략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친구들과 함께 구보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외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백남준은 구보타 역시 예술작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언젠가 작업실을 꼭 방문하고 싶다는 말을 던졌다. 이 말은 예술가들끼리 어렵지 않게 주고받는 호의이기는 하지만 백남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보타는 백남준의 제의가 매우 반가웠다. 사실 구보타는 머지 않아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기도 하였다.

구보타가 신주쿠의 나이카(內科)화랑에서 전시를 열자 가장 열렬한 관객은 백남준이었다. 그는 작품에 대한 칭찬에서부터 작품 평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이들은 급속히 가까워졌으며 이때 백남준은 31세, 구보타는 이보다 여섯 살이 적은 스물 다섯 살이었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 구보타도 때마침 플럭서스 창시인 조지 마치우나스가 기획하는 플럭서스 이벤트에 초청되어 뉴욕에 가게되었다. 이들은 숙명적으로 뉴욕에서 재회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는 같은 플럭서스 예술가 동료로, 또 구보타가 비디오예술에 손을 대게 되면서 같은 비디오작가로 유사한 활동무대를 갖게 되었다. 백남준은 소호의 그랜드 스트리트에, 구보타는 바로 옆의 설리반 스트리트에 작업실을 얻어 각기 본격적인 뉴요커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남편 명성에 가려 빛 못봐▼

백남준과 구보타는 때로는 연인으로, 때로는 동료 작가로 각각 자유로운 길을 걸었다.

구보타는 백남준 쪽보다 더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백남준의 성격이 워낙 괴퍅한데다 재정적인 후원자였던 백남준의 형 백남일이 둘 사이의 결혼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얼른 결혼이야기를 꺼낼 처지가 못되었다. 어느 날 구보타는 당시의 상황을 필자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말문을 멈추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던졌다.

“백남준은 강한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이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은 흡사 백남준이 당시 누군가 성격이 강한 여인과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것이다. 구보타는 당시 이 말을 꺼내면서 곧 샬로트 무어만과 어느 한국인 여성디자이너 이야기를 이어갔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지나친 상상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1977년에서야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만난 지 14년만의 일이다. 언젠가 필자는 백남준에게 결혼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원래 동문서답을 잘하는 백남준이지만, 엉뚱하게도 “예술 하는데 결혼이 꼭 필요한가? 어쩌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갔더라구, 그냥 불쌍해서 결혼해줬어”라는 것이었다.

구보타 시게코는 비디오 예술가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작품의 질적 생산에서도 백남준 못지 않은 예술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매일 보는 사이지만 작업세계도 전혀 다르다.

▼84년 한국땅 처음 밟아▼

사람들은 구보타가 백남준의 그늘에 가린 피해자, 또는 희생자라고 말한다. 원체 거물인 남편을 만난 데다가 비디오예술의 원조인 남편 곁에서 같은 비디오예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구보타의 비디오예술은 매우 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메타포를 유지한다. 그녀는 70년대 초에 처음으로 조직된 여성비디오 페스티벌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개인전만 20여 회에 이르는 등 화려한 활동경력을 갖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 ‘뒤샹의 무덤’은 20세기 현대미술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마르셀 뒤샹을 직접 만났고 또 그가 죽은 뒤 프랑스 루앙에 있는 무덤을 찾아가 뒤샹의 예술적 삶을 비디오로 조명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984년,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34년만에 고국을 방문했을 때 구보타는 백남준의 뒤 를 따라다니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백남준은 유명인 이기 이전에 한국인이고 그와 결혼하여 처음으로 남편의 고국을 방문한 감회는 남다른 것이었으리라.

지금도 병석에 있는 남편을 위하여 예술가 구보타, 아내 구보타는 하루가 멀다 않고 뉴욕의 한인 타운에 김치를 사러간다.

언젠가 구보타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백남준이 아프니까 이제 내가 아내인 것 같고, 이제서야 우리는 허니문을 온 것 같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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