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박두진 유고 시집 「당신의 사랑앞에」

  • 입력 1999년 9월 17일 18시 15분


해의 시인, 돌의 시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과 신을 발견하고 기독교적 이상과 윤리의식을 추구했던 시인. 시와 역사, 시와 시대정신, 그 긴장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고 학처럼 고고했던 청록파 시인 혜산 박두진(兮山 朴斗鎭·1916∼1998). 그는 20세기 한국시사(詩史)와 정신사(精神史)에 있어 하나의 상징이었다.

박두진이 세상을 떠난지 꼭 1년. 그의 1주기를 맞아 유고 시집이 나왔다. ‘당신의 사랑 앞에’ (홍성사). 세상을 떠나기 전 10여년간 발표했던 시 76편이 실려있다. 1주기였던 16일엔 경기 안성 가족묘지의 박두진묘소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이 시집은 박두진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정의 흔적이다. 세상의 어둠과 인간의 나약함 무지를 태워버리는 절대 정화(淨化)의 빛을 갈구했던 그의 60년 시적 편력(遍歷). 지상에서 절대세계로 향하는 힘찬 비상(飛翔)이 시편 곳곳에 선명하고도 압축적으로 새겨져 있다.

‘아 몇만 년/ 몇만 생애의 옛날부터 보고 싶던 꿈/ 꽂고 싶던 깃발/ 하고 싶고 이루고 싶고 지르고 싶던 불,’ (‘어느 새벽 꿈’중), ‘햇덩어리 너를 향해/ 깃발 하나 없이/ …/ 온몸으로 깃발이 되어/ 뛰고 뛰고 뛴다’ (‘겨울나라 시’중).

화려한 비유나 치장은 없지만 그의 시정신은 여전히 고결하고, 세상을 향한 외침은 여전히 당당하다. 광야의 깃발처럼 도도하고 계곡의 급류처럼 거침이 없다. 그리곤 끝내 바다에 이르러 드넓은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 바다에서 자연과 인간과 신은 합일(合一)을 이룬다.

‘내가 다만, 내가 아닌, 너의 안의 나/ 네가 다만, 네가 아닌, 나의 안의 너/ …/ 영원 활활 불사의 넋,돌의 우리의 하나임을’ (‘수석영가Ⅴ’중), ‘우주 천체 그 한 점 혈육/ 돌 중의 돌, 너여// 들고 보아도 나의 너/ 안고 보아도 너의 나’ (‘수석영가Ⅹ’중).

비단 이 시집 뿐만 아니라 박두진 시를 관통하는 매력은 내면세계(종교적 구원)와 현실세계(역사와 시대비판)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자연 속에서 이 땅의 현실을 보고 자연 속에서 구원의 신을 찾는다. 그리고 신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현실을 발견한다. 그 팽팽한 줄타기 혹은 긴장이 있기에 박두진 시는 투명하고 날카로운 정신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정신의 긴장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 시집은 잘 보여준다.

시인은 갔지만 시는 우리 곁에 남아 이렇게 노래한다. ‘붉은 부리 파랑 날개 하얀 앞가슴/ …/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있을까/ 보고 싶은 새여/ …/ 영원 영원히, 불탈 수 있게, 돌아와다오 새여’ (‘파랑날개 새’중).

그는 돌아올 것이다. 돌아와 돌처럼 견고하고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우뚝 설 것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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