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홍영철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 입력 1999년 10월 19일 20시 09분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지금은 지워진, 아니 희미해진

마음의 꽃밭 하나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결코 스스로 열리지 않는 낡은 창문 너머

내가 말하면

바다가 되었다가 강물이 되었다가

때로는 하늘로 열리는 오솔길이 되는

굳이 말하지 않고 바라보아도

슬픔이 되었다가 기쁨이 되었다가

상처를 감싸는 가슴도 되는

여기 아주 따뜻한 꽃밭 하나 있었어요

꽃밭 속에 노래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바람만으로도 배를 채우시던 어머니

햇빛만으로도 힘을 키우시던 아버지

그가 피워냈을까

지금은 없는, 아니 없을 수 없는

마음의 꽃밭가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문학사상’10월호에서

여기 저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가을빛이 서리는 남도의 강물이나 서해의 바닷바람 앞에서 문득문득 눈앞이 아득해지곤 했다. 그리곤 곧 고개가 숙여졌다.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공터를 잃어버린 나날들에 대한 쓸쓸함이 밀물져와서였다. 그래, 여기 수선화가 있었다. 여기 마음의 공터, 그 꽃밭에 어머니같은 아버지같은 노래같은 바람같은… 그런 수선화가.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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