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25주년에 즈음하여]

  • 입력 1999년 10월 24일 19시 26분


▼투철한 기자정신의 실현

잠시 25년 전 이 자리로 돌아가봅니다.

공휴일이던 74년 10월24일 오전 9시15분. 동아일보사 3층.

편집국에 180여명의 기자들이 모였습니다. 편집국 기둥엔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는 유난히 큰 글씨가 나붙었습니다. 몇장 남지않은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날 그 자리는 선배들이 뜨거운 가슴을 한데 모아 자유언론실천의 결의를 다지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는 현실에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끼며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언론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유신독재의 심장을 향해 활시위를 날렸던 그 무서운 결단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날 이 자리에서 모아진 자유언론실천 결의는 투철한 기자정신의 발현이었으며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대정신의 실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는 자랑스러웠던 선배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동아일보사를 떠나야 했던, 불행했던 언론사(史)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는 회한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꺼져가는 자유언론 수호

25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자리에 선, 후배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는 글자 하나 하나를 가슴 속 깊이 새겼던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 선배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결코 불행했던 우리의 역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동아일보사의 후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숙연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동아투위 선배들을 모두 함께 이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말할 수 없이 답답하게우리들의가슴을 억누르고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를 떠나 거리에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선배들이나, 동아일보사에 남아 그나마 꺼져가는 자유언론의 현장을 지켰던 선배들이나 모두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배들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하고 그 정신을 실천하려했던 180여명의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을 모두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로 부르고 싶습니다.

어느 동아투위 선배는 “오늘 기념식이 열리는 이 자리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산실(産室)이기도 하지만 자유언론을 외쳤던 선배들이 동아일보사를 떠나야 했던 언론탄압의 현장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화해를 위한 자리

역사에는 영욕이 교차합니다.

더구나 우리의 현대사는 오욕과 회한으로 점철된 기록입니다. 오욕과 회한으로 얼룩진 역사 속에서 우리는 모두, 그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이 불행했던 역사의 상처가 반드시 치유되고 극복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치유되고 극복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기말,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가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25주년 모임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함께 한 그날 그 정신으로 돌아가 진정으로 화해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는 동아일보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을 위해 회사측이 먼저 적극적으로 ‘화해의 장(場)’을 열어 줄 것을 촉구합니다. 또 동투(東鬪)선배들도 대승적 자세로 ‘화해의 장(場)’에 나서 주기를 바랍니다.

저희 후배들도 진정한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실천에 나설 것을 다짐합니다.

▼스스로 돌아보는 자성 필요

우리는 오늘, 25년 전 선배들이 남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점도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밝히고자 합니다. 80년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든지, 독재권력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했던 암담했던 시절도 있었음을 숨기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독재권력의 폭압적 언론통제 속에서도 자유언론의 명맥을 이어가려 했던 고심의 흔적들을 내세워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암울했던 시절, “그래도 동아일보”라는 국민적 평가는 불행했던 언론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우리가 오늘에 이르러 깊이 되돌아보아야 할 일은 지금 우리 후배 기자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 선배들이 외쳤던 자유언론의 정신이 얼마나 살아 숨쉬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편집하는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선배들이 했던 것과 같은 처절한 고민과 자기 반성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기자정신이란 화두(話頭)를 놓고 밤을 새우며 치열하게 토론하고 울분을 터뜨리던 뜨거웠던 기억들은 이제 점점 더 아득해져가는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권력과 상업주의, 그리고 국민의 알권리가 상충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시대적 요구인 언론개혁에 대해서도 10·24정신으로 함께 지혜를 모으고자 합니다.

▼'10·24정신' 가슴깊이 간직

우리는 선배들이 외쳤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정신이야말로 선배들이 우리 후배들에게 전해준 가장 소중한 자산임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25년 전 오늘, 동아일보 편집국에 메아리쳤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아직도 역사의 멍에처럼 남아 있는 불행했던 과거의 상처가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999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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