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자유언론 실천선언 25돌 1974~1999]

  • 입력 1999년 10월 24일 19시 26분


《24일은 동아(東亞)자유언론실천선언 25주년 기념일. 25년전 이날 동아일보사 기자 180여명은 서울 광화문사옥 3층 편집국에 모여 박정희(朴正熙)정권의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자유 실천운동을 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언론사와 민주화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선언을 2회에 걸쳐 재조명함으로써 이 시대의 진정한 언론의 자유와 윤리는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70년대의 언론상황은 참담했다.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박정희정권은 72년 11월23일 유신헌법을 제정함으로써 본격적인 권위주의 독재시대의 막을 올렸다.

우리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강압통치 아래서 국민은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다. 체제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됐다. 국가안보가 지상명제가 돼 사회 전 영역을 내리눌렀다.

▼유신이후 탄압 가속화

언론탄압은 극에 달했다. 74년 1월8일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는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는 모든 행위를 보도할 수 없도록 했다. 실정법을 뛰어넘는 초법적 조치로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하나의 관행이 돼가고 있었다. 기관원들이 편집국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크고 작은 거의 모든 기사에 간섭했다. 걸핏하면 기자들을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고 가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했다. 언론으로서는 실로 고통스럽고도 자괴(自愧)스러운 시기였다.

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며 유신후 처음으로 시위를 벌였을 때도 언론은 철저히 침묵했다.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실망은 점점 커졌다.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광화문사옥 앞에는 동아일보의 각성을 촉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동아일보 너 마저…”라는 절박한 심정에서 일제(日帝)와 이승만(李承晩)독재에 면면히 항거해 온 동아일보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했다.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은 4년여에 걸친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왔다. 민주화와 언론자유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언론의 자성(自省)과 맞물리면서 언론인 스스로가 언론자유를 쟁취하자는 실천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74년 10월 24일, 오전 9시15분 동아일보사 기자 180여명은 편집국에 모였다. 분위기는 격앙돼 있었다. 바로 전날 송건호(宋建鎬)편집국장 한우석(韓宇錫)지방부장이 서울대농대생들의 유신반대시위를 기사화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왔기 때문이었다.

편집부의 홍종민(洪鍾敏)기자가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읽어내려 갔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다. 정경부 기자로 사회를 맡았던 장성원(張誠源)국민회의의원의 회고처럼 언론자유가 비로소 맥박 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회사측과 기자들은 실천선언의 보도문제를 놓고 논의를 했다. 기자들은 ‘선언식과 선언문을 1면에 3단 이상의 크기로 보도하자’고 의견을 모았고 회사측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이날 밤 김상만(金相万)사장이 기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편집국에 들어서자 기자들은 “동아일보 만세”를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선언의 반향은 컸다. 한국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KBS MBC 등 전국 31개 신문 방송 통신사가 뒤를 이어 기사에 대한 외부압력 배제와 사실보도를 다짐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AP AFP 로이터통신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아사히신문 NHK방송 등 외국의 유수 언론들도 선언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했다.

▼개헌투쟁 기사 게재

국제인권단체인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는 “자유언론의 실천을 통해 불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동아일보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자유언론상을 보내왔다.

선언 후 동아일보의 지면은 달라졌다. 유신 반대 집회와 시위를 다룬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했다. 사회면(당시 7면) 왼쪽은 항상 대학의 시위기사로 채워졌는데 하루 평균 7∼10개 대학의 시위기사가 실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김영삼(金泳三) 당시 신민당총재가 “개헌을 위해 원외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 기자회견 내용이 1면 머릿기사(11월14일자)로 나갔다. 이어 윤보선(尹潽善) 백낙준(白樂濬) 함석헌(咸錫憲) 천관우(千寬宇) 김재준(金在俊) 김대중(金大中)씨 등 각계 대표 민주인사 50여명이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가진 ‘민주회복 국민선언대회’ 역시 1면 머릿기사였다(11월27일자).

국민의 반응은 뜨거웠다. 회사에는 “역시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를 보는 맛에 산다”는 격려전화가 쇄도했다. 당시 사회부기자였던 외국어대 김진홍(金鎭洪·신문학)교수는 “단 한 줄의 시위기사 속에서 민주회복의 열망을 확인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동아일보의 보도는 국민에게 놀라움과 감동으로 다가갔던 것같다”고 회고했다.

당시 동아방송 아나운서였던 수원대 전영우(全英雨·신문방송학)교수는 “우리는 너무 자랑스러웠다.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우리들 뒤에는 국민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자유언론실천운동이 2개월여만에 민주화운동을 확산시키는 형태로 급진전되자 유신정권은 광고탄압으로 동아일보를 압박해 왔다. 언론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백지광고사태의 시작이었다.

광고주들은 그해 12월16일부터 동아일보에 실어온 광고를 하나 둘씩 끊기 시작했고 마침내 12월 26일자 신문은 광고란이 하얗게 빈 채로 배달됐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말라는 정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의 광고란은 그러나 백지로 나가지 않았다. 전국에서 밀려든 유료 격려광고가 빈 광고란을 메우기 시작했다. 학생 종교인 직장인, 심지어는 초등학교 아이들도 저금통을 털어 격려광고를 냈다.

격려광고는 동아일보에 대한 신뢰와 성원의 표시였지만 크게는 민주회복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표출이었다.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탄환임을 알라’는 문구의 광고가 보여주듯 국민은 동아일보 광고란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민주화의 욕구를 분출시켰다.

75년 1월1일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격려광고는 5월13일 정부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할 때까지 계속됐고 건수는 총 1만352건에 달했다.

백지광고사태가 세계에 준 충격은 컸다. 미국 일본 영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했고 국제언론단체들은 앞다투어 동아일보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세계언론 지지 성명

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는 전세계 언론사에 보낸 성명에서 “IPI는 정치적 독립지인 동아일보를 제압하려는 한국정부의 희망을 좌절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전세계의 신문과 방송들이 동아일보를 지키는데 적극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WAN)는 그해 4월 18일 언론자유 증진에 현저하게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언론자유 황금펜상’을 동아일보 김상만사장에게 수여했다.

광고탄압은 동아일보 내부에서도 갈등과 대립을 낳을 만큼 그 상처가 깊고 컸다. 재정에 큰 타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런 가운데 기자들은 투쟁의 방법을 놓고 두편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한쪽은 ‘신문제작 거부를 통해서라도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쪽은 ‘투쟁의 유일한 수단인 신문제작 없이 효과적인 싸움이 되겠느냐’며 ‘제작 투쟁’을 주장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30여명이 회사를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회사를 떠난 기자들은 그해 3월17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발족시켰고 지금까지도 독자적인 자유언론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갈등과정에서 얻은 상처는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유신독재가 동아일보에 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를 입증한다.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이 우리 언론사와 민주화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그것은 동아일보가 독재권력의 탄압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기본요건인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같은 노력이 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장(場)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재호기자〉leejaeho@donga.com

▼東亞자유언론실천 선언문

우리는 오늘날 사회에 대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의 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선언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一.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一.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一.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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