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만 해도 성적증명서를 떼어줬다가 학생이 갑자기 유학을 떠나면 담임교사가 징계를 받았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당당히 ‘유학용 성적증명서’를 요구하고 교사들도 별말 없이 발급해줍니다.”
서울 강남지역 한 중학교 교사는 조기유학을 둘러싸고 달라진 분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서울의 일부 외국어고교에선 작년부터 해외유학반을 구성해 방과후 토플이나 미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SAT응시를 위한 수업을 하고 있다.
교육부 재외동포교육담당 김석현과장은 “이달 중 공청회를 거쳐 법안이 개정되면 만17세 미만 전체를 대상으로 조기유학을 허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고졸이상이거나 예체능중학 졸업자로 학교장 추천을 받은 자 등 특별한 경우에만 자비유학이 가능했다. 조기유학이 ‘합법화’함에 따라 유학원 등 관련업계에선 그동안 남의 눈을 살피던 공직자와 ‘사회지도층’자녀를 중심으로 유학시장이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왜 가나▼
조기유학을 결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고3을 마치고 현지대학에 지원할 경우 중고교 수업내용의 차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
서울 S중학교에서 전교1등을 독차지하던 딸을 최근 미국 보스턴 인근 한 고교로 유학보낸 학부모 K씨는 “미국의 대입에는 SAT 점수 못지않게 봉사활동 등 과외활동이나 특기가 중요하다”고 전제, “국내에서 고3까지 마치면 운동장처럼 넓은 대입원서의 ‘활동(activity)란’에 ‘공부’‘헌혈’, 기껏해야 ‘과학경시대회 입상’ 정도밖에 써넣지 못한다”고 말했다.
비용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기숙사를 갖춘 미국 동부 중상급 사립중고교의 경우 비용은 1년에 수업료와 기숙사비 등을 합해 2만5000(3000만원)∼3만5000달러(4200만원)가 일반적.
“국내에서 영어며 피아노 미술 등을 과외공부시키는데 드는 돈을 따져보면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한 비용이예요.”
초등학교 5학년 딸을 일단 미국에 단기어학연수(10주에 700만원 코스)를 보낸 뒤 잘 적응하면 눌러 앉힐 계획이라는 학부모 H씨의 말. 실제 91년 당시 중2,3학년이던 두 딸을 호주 시드니로 유학보낸 K씨는 “현지대학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두딸에게 든 돈은 하숙비 등을 포함해 총 1억4200여만원”이라고 계산했다.
우리나라의 ‘비교육적’ 교육환경 때문에 유학을 결심했다는 이도 적지 않다. 전교석차 10위권이던 고교1학년 딸을 6개월전 미국으로 유학보낸 L씨도 그런 경우. 다음은 L씨에게 딸이 지난달 보내온 편지다.
“엄마, 여기 와보니까 스트레스를 안받아 좋아. 한국애들은 학교에선 졸고 저녁에 학원 가서 공부하잖아. 모든 애들이 학원에 다니니까 선생님이 ‘너희들 이거 학원에서 다 배웠지?’하며 넘어갈 때 비애감을 느꼈어. 여기서는 공부할 양이 많아서 새벽3시까지 공부할 때가 많아. 하지만 모두 학교수업과 연관된 숙제여서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즐거워. 시험을 봐도 배운 것에서만 나오니 틀려도 내 책임이라는 수긍이 가.”
▼유학의 늪▼
현지에서 자녀들이 향락에 빠지지 않는 한 유학이 크게 실패하진 않으리라는 게 학부모들의 대체적인 믿음. 최소한 ‘영어라도 건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자들에 따르면 조기유학의 길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특히 요즘엔 미국 동부지역에 한국학생들이 포화상태라고 판단, 한국학생이 적은 아이오와 유타 텍사스 켄터키 아이다호 미시시피주 등지로 자녀를 보내는 경향이 생겨났다. 미국적 사고방식을 익히기 위해서라지만 정보부족과 문화적 차이때문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고교 전교회장을 하다가 1년전 미국 아이오와주로 유학을 떠난 C군. 얼마전 자신을 놀려온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주먹을 날렸다가 법정까지 가게 됐다. 국내에선 양측의 화해로 무마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미국에선 일단 ‘사람을 치면’ 범죄자로 취급돼 경고없이 정학조치를 받는다. 대학입학원서에도 기록이 올라가기 때문에 C군은 원하는 코넬대학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다.
▼세살버릇이 중요▼
“국내에서 공부하던 습관이 현지에선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유학원 에주캐어(02―3143―2037)의 추교일원장은 “한국학생들이 단기적으로는 응용력이 뒤진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음은 국내 중학교에서 학급성적 10위권을 달리다 2년전 미국 델라웨어의 한 고등학교로 유학간 K양 부모에게 학교측이 최근 보내온 영어과목평가서. 평가기준은 A(매우 우수), B(우수), C(만족스러움), D(평균이하), E(낙제).
“출석〓A/재능〓B/읽기〓C/쓰기〓C/시험(100점 만점)〓66점/숙제〓C/노력〓B/말하기〓B/듣기〓C/평가〓문법문제나 빈칸 채우기는 놀라울 정도로 잘함. 그러나 문제는 말하거나 쓰는 거의 모든 문장을 똑같은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있음. 퀴즈를 내면 잘 맞히나 수업시간에 너무 조용해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음.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질문하는 기술이 필요함.”
서울 Y중학교에서 중하위권을 달리다 3년전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간 K양은 근대전쟁사 과목에서 “읽고 이해하는데 남들의 2배가 걸리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 즐겁게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이 국내에서도 능력과 소질을 한껏 펼 수는 없는 것일까. 조기유학 전면허용이 국내 교육의 열등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교육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시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경제순위보다는 교육순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상위국가와 비교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교육수준이 최고수준은 아니므로 자비로 최고수준의 나라에서 공부하겠다는 열망을 막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미즈&미스터팀 김순덕차장 이호갑기자 이승재기자 이나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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