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김형찬/'0과 1'이 지배하는 21세기 예고

  • 입력 1999년 11월 1일 20시 06분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는 미국 미디어랩 소장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책 이름이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회장은 투자를 결정할 때 항상 묻는다. “디지털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회장은 21세기에 대비해 “디지털 방식으로 개방하라”고 제안한다. 디지털 방식이야 말로 융통성 있는 조직을 만드는 최상의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디지털은 이제 화두가 아니라 지배적 개념이 됐다.아날로그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디지털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 '2진법' 보편 원리로 ▼

▽‘0’과 ‘1’의 신비〓1은 ‘1’, 2는 ‘10’, 7은 ‘111’, 3개월 된 푸들 강아지가 코끝을 핥을 때의 촉촉함은 ‘1101101011010111…’, 실연당한 슬라브족 여인이 흘리는 눈물의 염도(鹽度)는 ‘100100111101100111…’.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연속적인 아날로그의 공간이지만 디지털은 모든 것을 분할하여 ‘0’과 ‘1’로 기호화한다.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두 요소를 설정하는 이원론은 복잡한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단순한 체계다.

하지만 이원론은 주역의 양(陽)과 음(陰),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처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가치관과 결합되기 십상이다.이원론은 사회적 편견과 결합하면 시대적 또는 사회적 한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디지털의 ‘0’과 ‘1’은 몰가치적인 수학의 이진법을 모델로 했기 때문인지 어디서나 보편적인 원리로 받아들여진다.

▼ 가상세계서 욕구 충족 ▼

▽축지법과 불로장생〓‘매트릭스’‘너바나’‘토탈 리콜’…. 모두 디지털의 가상세계와 아날로그의 현실 사이를 오가며 관객을 즐겁게 하는 영화다. 천지만물을 디지털 기호로 바꿔가는 인간이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하며 ‘축지법’을 구사하고, 자신마저 기호화해 네트워크에 존재함으로써 불로장생의 꿈을 실현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마이클 하임은 “가상세계의 최종 목적은 닻이 내려진 세계의 제약조건들을 없애버리고 닻을 올리는 일이다”고 말한다.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해 온 인류는 욕구가 더이상 물질로 충족될 수 없음을 절감하며 가상세계를 통한 욕구충족의 방식을 택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상품이 아닌 ‘욕망’이 생산 소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달리 정신적인 능력이 발달한 ‘인간’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 이전부터 물질 아닌 기호의 소비에 익숙했다.

다니엘 벨은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으로 경험에 대한 이론의 우위, 경험을 설명하는 기호의 발달을 꼽는다. 인간의 정신은 이제 이론과 기호를 통해 물질적 경험마저 조작한다.

▼ '제2의 바벨탑'세워 ▼

▽바벨탑을 다시 세운다〓철학자들이 수천년간 추구해 온 ‘본체’는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디지털 기호로 ‘현상’을 분해해 재구성한다.

기호의 이동과 보존에는 국경도 민족도 의미가 없다. 세계화의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자본’은 배타적인 이윤추구의 본성으로 인해 ‘세계화의 덫’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디지털은 이미 독점적 통제를 넘어선 ‘세계화의 힘’이 됐다. 이런 세계화는 약소 민족의 문화를 소멸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문화를 네트워크에 안전하게 보존하고 소통시킨다.

디지털은 형상과 소리, 시간과 공간,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모든 것을 소통시키며 질투심 가득찬 신이 무너뜨렸던 바벨탑을 다시 세우고 있는 듯하다.

김형찬기자<문화부·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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