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야 구필이를 업어라.” 박씨는 집에서 심부름하는 소년인 홍기군(당시 15세)의 등에 5세된 아들 구필이를 업힌 채 산등성이를 넘었다. 순간 갑자기 미군의 기관총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들의 비명소리에 돌아보니 어둠 속에 아이만 혼자 서 있고 홍기는 혼자 골짜기 아래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박씨는 허벅지에 총을 맞은 어린 아들을 안고 산기슭을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흑인병사가 총을 난사했고 아들은 가슴에 피를 쏟으며 숨을 거뒀다.
이 비극적인 상황은 노근리사건대책위원장인 정은용(鄭殷溶·76·대전 서구)씨가 자신이 겪은 당시 상황을 토대로 94년 펴낸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의 박씨는 바로 정씨의 부인이다.
최근 노근리 사건의 진상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소설 속에서 아이를 내려놓고 혼자 도망친 것으로 묘사된 ‘심부름하는 소년(홍기)’이 지난달30일 64세의 노인이 돼 당시 ‘마님’이었던 박씨의 집을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사라진 지 49년여만의 일이다.
“미안합니다.” ‘홍기’ 김모씨(대구 북구)가 정씨 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최근 노근리 사건이 부각되면서 정씨의 이름과 얼굴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자 수소문 끝에 찾아온 것이다.
“지금와서 옛날 얘기를 해서 어떻게 하겠어요. 삶과 죽음이 왔다갔다 했던 순간이 아니었습니까. 다 용서해서 보냈어요.”
당시 자신도 옆구리에 총을 맞은 채 아들은 산비탈 구덩이에 묻어야했던 박씨는 2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대전〓이기진기자〉doyoce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