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彌縫策(미봉책)

  • 입력 1999년 11월 4일 19시 20분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해진 옷을 입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특히 형제가 많은 집안의 동생들은 성한 옷 한 번 입어보기가 어려웠다. 무릎이며 엉덩이는 늘 기워서 입었다.

그렇다고 옷만 기웠던 것도 아니었다. 깨진 냄비, 물 항아리, 고무신, 장롱조차도 때우고 기워서 사용했다. 때문에 동네에는 종종 땜장이가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기우고 때우는 것을 한자어로 彌縫이라고 하며 임시변통으로 잠시 눈가림하는 방법을 彌縫策이라고 한다. 물론 언젠가는 다시 샐 수도 있으므로 아예 바꾸는 것만 못하다.

그런데 彌縫策이 군사작전에서 나왔다면 믿는 사람이 있을까. 春秋時代 周나라 桓王(환왕)은 평소 말 안 듣는 諸侯(제후) 하나를 골라 본때를 보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鄭나라 莊公(장공)이었다.

그래서 그의 제후 자격을 剝奪(박탈)해 버렸다. 과연 화가 치민 莊公은 길길이 반항하고 나섰다. 桓王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鄭나라를 쳤고 莊公도 단호하게 맞섰다.

하지만 여러 정황에서 莊公은 桓王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莊公은 특이한 전술을 구사했다. 즉 둥글게 진을 갖추어 전차를 앞세우고 그 뒤에 보병을 따르게 했는데 아무래도 전차의 사이가 너무 벌어져 안심이 안되었다. 그래서 일부 병력으로 그 사이를 메우도록(彌縫) 했는데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彌縫策이라고 수군거렸다. 다행히도 鄭나라는 桓王을 격파할 수 있었지만 그 방법은 다시 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彌縫策’이었기 때문이다.

참 어이없는 일도 많다. 물먹은 戰鬪機(전투기)가 추락하더니만 곧이어 대형참사가 또다시 발생했다. 꽃다운 젊은이 수십 명이 慘變(참변)을 당했다. 지난 번 유치원생 어린이의 떼죽음에 이어 또다시 빚어진 참극이다. 매번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법석을 떨지만 어디 한 번 제대로 된 대책 하나 세워진 적이 있었는가. 수십 번 경험하고도 이 모양인가. 이 땅의 爲政者들, 크게 覺醒(각성)해야 한다. 언제까지 彌縫策에만 매달릴 생각인가?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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