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세대 "낙서도 '記'에서 '打'로"

  • 입력 1999년 11월 8일 19시 16분


“낙서 투성이던 화장실벽 교실벽 책상이 깨끗해졌어요.”

연세대 학생회관 청소 담당자 이현옥씨(60)의 이야기. 20년 넘게 이 대학에서 일해온 한 관리담당자는 “2년 전만 해도 낙서제거용 페인트통이 화장실문 색깔별로 마련돼 있었다”며 “그러나 올핸 낙서를 지운 일이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말한다.

▼다른 배출구를 찾다▼

대학생들의 감정 ‘배출구’였던 학과방 낙서장은 이제 ‘N세대형’으로 대체되고 있다.

연세대 문과대의 경우 97년 PC통신망 나우누리에 과별, 동아리별 낙서장을 마련했다. 국문과 과방 종이낙서장 ‘날적이’엔 10월 한달간 118건의 낙서가, 나우누리 낙서장엔 299건이 올라있다. 문과대 부학생회장 최상천씨(21)는 “낙서장엔 신변잡기적 내용을, 통신에 마음먹고 의미있는 글을 올린다”고 최근의 경향을 설명.

라캉정신분석학회 김종주회장(신경정신과 전문의)은 “시대에 따라 인간의 ‘나를 표현하는 방식’은 변화해 왔다”며 “그건 동굴벽화일 수도, 문자일 수도, 그리고 통신에 오른 의미없는 기표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

“씨바 하놔가 이러케 잘하다니…. 졸라 하놔팬들 무시했었는데.”“이런거 써두 되나여? 암튼 신난당∼. 우히. 넘 쑥쓰러버 마시구들 오셔여∼∼.”(A대 93학번 국문과 복학생들과 B대 국문과 재학생이 인터넷과 통신에 올린 글)

서울의 S대 국문과를 졸업한 A씨(26·여)는 “과방 끄적이엔 비문(非文)도 잘 쓰지 않던 동창들이 통신이나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땐 이상해지는 것 같다”며 “내용도 이전엔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무거운’ 소재였다면 지금은 대부분이 프로야구 연예인 등 가벼운 것들”이라고 말한다.

인터넷철학박사 나도삼씨(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강사)는 “동일인이라도 어떤 매체로 생각을 전달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며 “특히 통신에선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읽혔는지 즉각 숫자로 체크되기 때문에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낙서는 보편적 본능▼

미술전문 MC인 한젬마씨(30·여)는 “라디오방송 등으로 긴장될 땐 늘 한손엔 볼펜을 쥔 채 무의식적으로 꽃이나 블럭을 그린다”고 말한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낙서가 인간의 표현 본능의 발로이자 타인을 향한 ‘말걸기’이며 그 낙서를 읽는 사람은 ‘엿보기’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형식이 자유롭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특성 때문에 비합법적 루트를 통해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기도 쉽다.

이런 탈규범적 행동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면 하위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맞은 편 골목 등 길거리에서도 심심잖게 보이는 ‘그래피티’가 대표적인 경우.

나교수는 “환자의 그림으로 무의식과 의식세계를 이해하는 의사처럼 낙서를 보면 사회가 앓고 있는 병, 지금 이 사회의 하위문화를 들춰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낙서-고백의 심리적 효과▼

“낙서는 심리적 배설 효과가 있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됩니다.”

서울대의대 신경정신과 류인균교수는 낙서나 중얼거림 대화 등 ‘털어놓기’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대해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미국 어스틴의 텍사스주립대 페니 베이커교수는저서‘털어놓기와건강’(학지사)에서 “털어놓기는 면역체계를 강화해 정신건강에 도움을 준다”며 무엇을 언제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에 대해 다뤘다.

이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대해 △무엇이 일어났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씨름’해야 한다는 것. 한번에 15분 이상 파고들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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