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또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예들 화력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나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문학동네)에서
이틀에 한 번은 병원에 가야 하는 많이 아픈 사람이 지난 여름내내 위로삼아 읽었다는 시. 읽을 때마다 마음자리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고, 그렇지, 그렇지, 싶었다고. 나는 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그 사람이 수화기 저편에서 낭송해주는 시를 받아적으며 드는 생각. 내 책꽂이에도 꽂혀있는 시집인데… 왜 지나쳤을까. 무엇에 정신이 팔려있어 아픈 자리에 새풀이 돋는 것 같은 이 시를 그냥 지나쳤을까.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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