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씨<41·한국쓰리엠㈜ 인사부장>
나는 일주일에 닷새를 근무한다. 그중 사나흘을 술마신다. 사원들 교육을 맡다보니 단합차원에서 술 마시는 일이 잦다. 또 꽤많은 후배들이 회사생활이다, 연애문제다 고민을 상담하려고 술한잔 사달라 조른다.
▼미안한건 알지만…▼
아내 고생도 참 많이 시켰다.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아 술마신 적도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가 터지자 상환통보를 받고 사면초가에 몰린 나는 결국 작년초 아내에게 이실직고했다. 아내는 고민 끝에 놀랄만한 빚을 대신 갚아줬다.
내가 음주를 ‘계급장’쯤으로 여기는 건 아니다. 이 사회에서 어차피 술을 안마실 수는 없으므로 마실 거면 실수없이, 즐겁게 마시자는 것이다.
94년말 회사의 차장급 이상 부부동반 모임에서 나는 베스트드레서, 베스트가수 등등을 뽑는 인기투표에서 80%의 지지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수상부문은 ‘베스트술꾼’. 나는 무대에 올라 상품인 생활용품세트를 치켜들었고 아내는 내가 아닌 자신에게로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매우 당혹해했다.
▼음주의 역사▼
아내와는 캠퍼스커플이다. 대학입학 신체검사 장소에서 가운을 입고 있는 서로의 모습에 반해 만났다. 학교 근처 족발집 막걸리집 골뱅이집을 함께 돌아다니며 아내는 마셔라, 마셔라 ‘유도’하기도 했다. 아버지나 오빠나 술이라고는 체질상 입에도 못대는 집안에서 태어난 아내는 술만 들어가면 배꼽잡을 얘기를 늘어놓는 내 모습이 재미났던 것같다. 연애 5년간 영화관이나 고궁을 간 낭만적 경험은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한번은 ‘로맨틱해지자’며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다. 함박스테이크를 먹고나자 할말도 없이 맹숭맹숭해졌다. 결국 맥주 다섯병을 시켰다.
▼Q&A▼
Q:당신은 술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기자)
A:술은 내 무의식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딱딱한 암반을 꿰뚫고 이를 이끌어내는 용천수입니다.(남편)
A:술은 즐거움과 슬픔의 야누스적 얼굴을 가진 액체입니다.(아내)
▼정신으로 마셔라▼
술은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 마셔야 한다. 내 주량은 소주 한병에 입가심으로 맥주 여섯병. 이를 넘어서면 단 한잔도 입에 대지 않는다. 주정도 없다. 아무리 밤늦게 귀가해도 아침 6시면 ‘칼같이’ 일어난다. 어떻게? 나는 무의식과 대화하는 훈련을 매일 밤 반복하기 때문이다. 잠자기 직전, ‘앞으로 4시간을 잔다. 그러면 피로는 완벽히 풀린다. 내일 아침 꼿꼿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는 긍정적 암시를 되풀이한다. 나는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내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술꾼 남편 바로잡는 법’도 일러준다. 강의의 골자는 ‘깻박이론’.
▼깻박이론▼
학생이 공부를 게을리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듯 술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반성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법. 사흘 내리 술마신 남편이 금요일 또 술마시고 올 땐 양심상 사과라도 사들고 온다. 문을 연 아내가 “빨리 들어오기나 하지 누가 비싼 사과 사오랬어?”라고 ‘깻박을 치면’ 수위가 차오르던 ‘양심의 가책’이라는 그릇은 와장창 부서진다. 남편은 이때 ‘당신이 이러니까 내가 술을 안먹을 수 없다’고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미국의 한 연구결과를 보면 성인이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할 때 3주 이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한다.
▼‘술의 바다’에서 순항하기▼
‘술의 바다’에서 좌초하지 않고 순항할 수 있기까진 아내의 도움이 컸다. 결혼 초기, 매일 새벽2시까지 나를 기다리다 울분이 폭발한 아내가 두살배기 딸 예나를 남겨두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나는 미련없이 회사(당시 S물산)에 사표를 냈다. ‘여기서 주춤하면 가정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불리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내가슴에 비수를 꽂은 셈이다.
밤마다 나를 기다리는 아내는 마음을 다스리려 책을 들여다 보는게 습관이 됐다. 요즘은 헤세의 ‘인도여행’과 법정스님의 ‘인연이야기’를 읽는다. ‘인연이야기’를 읽으면 윤회를 생각한다고 아내는 말했다. 전생엔 내가 아내였고 아내가 남편이었는데 맨날 술먹고 다니는 ‘업’을 저질러 이렇게 술먹는 남편의 아내로 태어나지 않았나, 싶더라고….
▼아내 정선주씨의 말▼
나는 워낙 낙천적 성격이에요. 이웃 주부들이 “술 좋아하는 남편을 두고 어찌 그리 즐겁냐”고 물으면 “술먹는 것도 개성이고 실력이다”고 대답하죠. 술취한 남편에게 아기 옹알이 받아주듯 “어, 어, 그래?”하고 대꾸하다 보면 고민이며 회사생활이며 평소 듣기 어려운 얘기를 주르르 뱉어내요. 단, 술만 먹으면 5만원, 10만원어치 장미꽃을 사오는데 꽃대신 현금으로 줬으면 합니다. 이 세상 술먹는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술, 마실 수 있어요. 그러나 대문 앞에 서면 뺨과 와이셔츠깃에 루즈자국이 남아있는지 정도는 확인하는 게 에티켓입니다. 이것도 못지키는 남편은 술꾼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 남편은 술마실 권리가 있어요, 이젠.
이희씨(한국쓰리엠㈜ 인사부장)는 술상이 있어야 화제가 만발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83년 동갑내기 아내 정선주씨와 결혼, 딸 예나(15)와 아들 우중(9)을 두고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정리〓이승재기자〉sjda@donga.com
▼술의 사회경제학▼
97년도 한해 걷힌 주세는 1조7900억원으로 6차로 고속도로를300㎞ 건설할 수 있는 돈.
우리 국민이 연간 마시는 술은 310만t으로 잠실 실내수영장을 3만1240번 채울 수 있는 양. 음주인구(1800만명) 1인당 연간 맥주 204병, 소주 120병, 위스키 2병 등을 마신다. 주점업사업체 종사자는 26만3000여명(‘삐끼’ 등 제외). 또 성인남자 중 12%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이상 96년 통계)
부산대 사회학과 박재환교수 등이 쓴 ‘술의 사회학’(한울아카데미)에 따르면 우리사회는 ‘주본(酒本)주의’사회. 술은 집단적 몰입을 만든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같은 하나의 ‘토템’이며, 사람들은 이 음주토템을 나누면서 하나의 ‘알코올 부족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
또 우리사회에서 술자리는 ‘연줄’을 형성하는 터전. 많은 의사결정이‘탄생’한다는 점에서 산모의 자궁과 유사하며 ‘술’은 모유와 같다고 해석했다.
〈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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