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81)

  • 입력 1999년 11월 25일 18시 51분


언니, 우리는 파업 일자를 닷새 뒤로 남겨 두고 먼저 유인물의 내용에 대한 최종 검토를 했고 어떻게 행동에 옮길 것인가를 결정했어요.

파업을 시작하기 이틀 전에 먼저 정당성과 대중을 확보하기 위해 어용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올바른 투쟁을 촉구하고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조합원총회 소집 서명운동에 들어갈 작정이었어요. 그리고 해고자들이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출근투쟁으로 이번 파업의 목표와 의미를 일반 노동자들이 자신의 것으로 깨닫도록 할 셈이었죠. 그래서 합세한 노동자들로 투쟁의 중심을 형성하고 대중동원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는데 우리는 너무 신중했고 노동자들은 이미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상황에 이른 것을 우리가 몰랐어요.

해고자 네 사람과 우리들 중에 일을 맡게 된 일곱 사람이 회사의 각 부서마다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열 시의 오전 휴식 시간에 신자 언니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작업장 한가운데서 유인물을 읽으며 파업의 필요성을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급히 내부 회의를 소집하고 나서 점심 시간에 일어서기로 결정을 했지요. 점심을 먹고 열두 시 반 쯤에 식당 앞 마당에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요. 기헌이가 핸드마이크로 ‘모입시다 모입시다 모입시다, 철통 같은 단결로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하면서 선동에 들어갔지요. 관리직들이 당황스런 얼굴로 뛰쳐나와 직접 말리지는 못하고 우리에게 ‘대충 했으면 그만 해산하고 말로 해보자’면서 따라 다녔구요. 우리가 운동장 앞의 휴게실에 이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나와 인원은 백여 명으로 불어났어요. 가담한 숫자가 많아지자 망설이면서 구경하던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얻었는지 모두 행렬에 끼어들어 또 백 오십여 명으로 불어났구요. 우리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나 ‘진짜 사나이’ ‘사노라면’을 부르며 각 작업장을 돌아서 한 시쯤에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천여 명의 군중으로 변해 있었답니다. 마이크를 잡았던 기헌이가 자연스럽게 사회를 보았는데 그는 우선 파업 대표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모여있는 군중 가운데 각 작업장별로 대표를 추천해줄 것을 요청했어요. 그렇지만 미리 계획되었던 게 아니라 군중의 어느 모퉁이에서 아무개요 라고 소리치면 그를 일단 앞으로 나오게 했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나오게 해서 일렬로 죽 늘어세우고는 파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정한 대표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가부간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될 줄 알았지만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사회자가 마이크에다 대고 ‘여러분 지금 갖고 계신 선언문의 내용에 찬동하시면 박수를 쳐주세요’했더니 와아 하는 함성까지 지르면서 모두 박수를 쳐대는 거예요. 이에 용기가 났던지 사회자가 내친 김에 ‘여러분 그러면 앞에 있는 이 분들을 파업 대표로 인정한다면 박수를 쳐주세요’했더니 다시 열렬한 박수. 우리는 그 자리에서 협상부, 경비부, 식사부, 문화부를 구성하고 파업 돌입을 선언했습니다. 밖에서 현수막과 머리띠를 만들어 들이고 농성 도중에 부를 노래도 복사해 오고 대표부의 결정에 따라 노동자들이 사무실로 몰려가 관리직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내 버렸어요. 지게차를 정문 앞에 끌어다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비부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지키도록 했구요. 그 때가 세 시 반 쯤이었는데 곧장 파업의 요구사항에 관해서 대중토론에 부치는 순서로 들어갔습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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