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장 초당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유엔 평화유지국의 유일한 한국인 전문요원 송혜란(44). 독립만 얻었을 뿐 총성이 멎지않는 동티모르에 26일 짐을 풀었다. 93년 8월 아프리카의 내전지역 소말리아로부터 시작해 크로아티아 동(東)슬라보니아 보스니아로 이어진 행로. 그의 일터는 늘 총알이 날아다니고 지뢰가 터지고 매복한 저격수가 등 뒤를 노리는 곳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유엔 평화유지국 전문요원으로 활동한 6년여의 르포르타주. 분쟁 당사자간의 대립을 조정해가며 폐허 위에 새로운 생활기반을 만들어내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먼저, 한국땅을 떠나 더 넓은 세계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미래개척의 지침서로 읽힐 수 있다. ‘유엔에 진출하는 몇가지 방법’ 등 구체적 정보를 전하는 장도 그렇지만 대학 2학년 중퇴 후 맨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유엔기구 직원이 된 저자의 경험이 그야말로 생생한 정보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어학 실력도 학벌도 국적도 아닌 태도(attitude)”라고 말한다.
‘유엔미션(mission)의 일은 지시를 단순히 수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이벤트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은 한 의지 강한 여성의 성공담이나 새로운 인기직업으로 떠오르는 국제기구 취업 안내서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다. 미디어의 외신뉴스로 읽을 때는 강 건너 불처럼 멀던 이야기들이 생생한 내 이웃의 고통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고향땅 크로아티아로 돌아가겠다며 드라바강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수백명의 세르비아 노인들.
눈을 부릅뜬 채, 목이 졸린 채, 옷이 벗겨지거나 질서정연하게 쓰러진 채, 억울하다든지 강간당했다든지 집단살해 당했다든지 살아서 다할 수 없었던 마지막말을 하소연하던 무고한 주검들.
희망이란 단어 자체가 사치스럽게 들리는 땅. “두고보자, 신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며 남자들이 술로 날을 지새우는 동안에도 빵 한조각 기름 한병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던 아낙들.
“지난 6년간 사람이 어떻게 가족과 생이별하는가, 살기 위해 어떤 수치와 모멸을 견뎌야 하는가, 어떻게 정의와 도덕이 폭력 앞에 무릎을 꿇는가를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이제 그것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목청 높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지요.”
저자는 보스니아에서 동티모르로 전근하기에 앞서 4일간의 휴가를 얻어 경기 광명시 어머니집에서 질리도록 김치를 먹고 떠났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