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학생이 된 큰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기 학부모 회의에서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퍽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을 야단치는 ‘악역’은 담임이 할테니 가정에서는 아이가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감싸안는 역할만 하라는 요지였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가 힘들어할 때 자녀가 처한 상황을 인정해 힘을 보태주고 더 나아가 자녀의 어떤 허물이라도 감싸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상담을 하다 보면 반드시 부모와 상의가 필요한 내용인데도 도저히 집에서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는 아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우리 엄마 그 사실 알면 가무러치고, 우리 아빠 그 사실 알면 나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가정과 부모는 청소년들에게 최후의 피난처가 돼야 한다. 10대 자녀들이 바깥에서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더라도 일단 집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조성돼야 한다.
한국의 부모들이 가장 부족한 부분은 자녀와의 대화이다. 10대 자녀 문제로 상담을 한 부모들은 대부분 “마음을 열고 자녀와 대화하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자녀를 이해하라.”
“자녀와 대화를 하라.”
“자녀의 마음을 읽으라.”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매번 ‘그래야지’ 하면서도 생각만 머리에서 맴돌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부모들이 자녀의 사고와 언행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대화는 상대방 인정하기로부터 출발한다.
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성 친구이고 다음으로 동성 친구, 그리고 학교 성적 등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들이 원하는 관심거리의 순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입시가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이성친구 등 이른바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할 뿐이다. 자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부모가 “너는 그것도 말이라고 하니”라는 식으로 응답을 하면 자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바깥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라도 편안하게 이야기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자녀가 이야기한 내용을 받아들일 자세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자녀가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든 진지하게 들어주고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자녀와 대화를 여는 지름길임을 잊지 말자. 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 ‘가무러치지 않고, 때리지 않는’ 부모가 되자. 가무러칠 만큼, 그리고 때려주고 싶도록 미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양해경〈가족과 성 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