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그렇게 기구했다. 임시정부가 이국의 하늘 아래서 셋방살이를 하는 동안 이 나라의 왕궁터에는 당당한 모습의 조선총독부청사가 들어서 있었다. 광복이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 집권 세력엔 총독부에서 복무하던 관료들, 친일파가 적잖이 포함되었다. 백성을 한낱 통치의 대상 쯤으로 여기던 시대의 모습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정부 청사가 되었다.
정부가 커지면서 흩어져 있던 각 부처를 모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현상설계를 거치면서 건축가의 계획안대로 건물은 기초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는 건축가를 바꾸었다. 건축사법 위반이라는 지적에도 이국의 설계집단에게 다시 용역을 주었다.
새로운 정부종합청사는 세종로에 그렇게 세워졌다. 경복궁 담장 바로 너머의 22층짜리 건물. 유서 깊은 수도의 경관을 무너뜨리는데 그 나라의 정부가 앞장섰다.
정부는 더욱 커졌다. 경기 과천으로 분가를 했다.천도(遷都)에 해당하는 사건이니 야심을 가질 만도 했다. 그러나 만들어진 건물은 군대 막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네모난 상자에 누런 타일을 붙이고 네모난 구멍창만 뚫어놓은 똑같은 건물 여섯 동이 늘어섰다. 고전적인 권위주의는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의 전체주의가 들어섰다.
정부과천청사는 지극히 배타적이다. 정문이든 곁문이든 문으로는 공무원만 들어설 수 있다. 명찰이 없는 일반인은 방문객 안내소부터 찾아야 한다. 그 방문객안내소로 가는 문은 담장 한 쪽을 헐어낸 이른바 ‘개구멍’이나 마찬가지다. “왜 왔느냐”는 경찰의 질문을 받으며 높다란 계단을 올라야 방문객 안내소로 들어설 수 있다.
장관 집무실까지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세금 내는 주인된 권리라고 주장하는 국민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정부청사가 그렇게 험상궂게 국민을 대할 필요도 없다. 호화롭게 지어도, 싸게 지어도 눈총을 받는 것이 관공서 건물이다. 그렇다고 건물이 굳이 그렇게 밋밋한데다 직각 보행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대통령이 바뀔 때 덩달아 바뀌는 고급관료가 아니라면 정부청사에 근무하는 공무원은 모두 옆집 아저씨고 아주머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세금 내는 국민들이다. 그런 이들이라고 굳이 이런 삭막한 건물에서 근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구멍가게 아저씨의 창의적 사고는 자신만 먹여 살리지만 공무원의 창의적 사고는 국민을 먹여 살린다. 이런 건물이 사람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볼 수는 없다.
타일의 시대는 갔다. 정부청사는 대전에도 마련되었다. 새 건물은 경제적 자신감만큼 비싼 재료들을 썼다. 동네 상가도 외부에 돌을 붙이는 세상인데 정부청사에 돌을 쓴다고 나무랄 국민은 없다는 확신도 생겼다.
그러나 새 건물에도 과거의 모습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을 무조건 움츠리게 하는 크기, 좌우대칭, 일률적으로 뚫어놓은 창은 건물에서 사람의 냄새를 지워버렸다.
관계가 편치 않은 나라에 대사관을 지을 때는 주의할 점이 많다. 테러와 염탐을 방지해야 한다. 건물은 울타리로부터 멀리 있어야 한다.대사실과 청소원실을 구분할 수 없게 창은 모두 같은 모양으로 작게 뚫어놓는다.
정부청사는 그런 원칙을 고스란히 따랐다. 국민 모두를 관계가 편치 않은 대상으로 보고 있다. 건물은 광활한 대지의 한 가운데 배치되었다. 자동차 이외의 접근 방법은 아예 생각조차 않고 있다. 자동차가 없는 민초(民草)는 세금을 얼마를 내든 여름날 뜨거운 뙤약볕 아래 수십 분을 걸어야 민원실에 들어설 수 있다. 동서남북 네 개의 출입문 중에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두 개밖에 없으니 잘못 짚으면 그 큰 건물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
광복 직후에 형성된 일그러진 국민과 정부의 관계는 그렇게 건물로 보존되었다. 위계, 지시, 경직, 보신, 무사안일, 복지부동…. 이런 단어들은 공무원 세계를 표현하는 일상적인 어휘들이었다. 정부청사는 그 어휘들이 고스란히 건축으로 표현된 어두운 시대의 모습이다.
조선총독부청사는 헐렸다. 그 건물의 건축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반발도 있었다. 그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는 의견과 평행선을 이루었다. 정치적 결단에 의해 건물은 사라졌다. 주목할 점은 그 건물이 받은 건축적 찬사다. 우리가 물어야 할 점은 ‘수십년이 지나도 우리 손으로 지은 정부청사가 그런 찬사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정부대전청사의 울타리 구석에는 한적한 섬처럼 어린이집이 있다. 청사 울타리 내에서 유일하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집이다. 그 곳에서 노는 어린이들이 자랐을 때 그들은 정부청사를 그들의 눈으로 평할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우리의 건축을 지켜보고 있다.
서현
▼인도 샹디가르 주정부 청사▼
인도는 1947년 독립했다. 그러나 그 독립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 분단의 경계선은 펀잡주(州)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펀잡주의 주도(州都)가 파키스탄 쪽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도 정부는 새로운 주도를 만들어야 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샹디가르.
네루 수상은 이 도시의 건축 계획이 새로 독립한 나라를 세계에 보여 줄 기회라고 믿었다. 건축가가 제시한 화두는 ‘열린 손’이었다. 새로운 도시는 닫힘에서 열림으로 나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통에서 미래로,내부에서 외부로열려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종교의 차이와 카스트제도로 인한 벽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다.
건축가는 이 추상적 아이디어를 건물로 풀어냈다. 건축가는 이곳이 인도임을 잊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의 직사광선이 건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 벽에는 다양한 모양의 베란다와 차양이 설치되었다. 건물의 전면에는 대지를 식히기 위해 거대한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다.
공기의 흐름과 비의 영향도 꼼꼼히 계산되었다. 아직 만족스럽지 않은 시공능력을 고려하여 건물의 거친 콘크리트는 그냥 노출되었다. 그렇게 들어선 건물들은 ‘민주적 기념비’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샹디가르는 아직 미완성이다. 정치 불안으로 인해 많은 부분은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더 지어야 할 건물들도 남아있다. 인도인에게 50년은 아직 도시의 완성을 이야기할 시간은 아니다. 샹디가르의 주청사는 그래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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