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권위가 의심받는 시대, 마니아 사이에 인기있는 TV외화 시리즈 ‘X파일’의 등장인물들은 때때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진실은 저 밖에 있다(Truth is out there).”
‘저 밖’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곳에 있다는 ‘truth’는 추상적 ‘진리’와 사실적 ‘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심오한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거부했을 때 남는 것은 실증 가능한 진실 뿐일지도 모른다.
▼일상 모든 것이 진리의 근본▼
▽‘몇 가지’진리〓수필집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성철스님에게 생활신조를 여쭌 적이 있었다. 성철스님은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고 말했다. 전설적인 용맹정진(勇猛精進)의 주인공답게 세속의 인연을 끊고 ‘일체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이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얻는 것은 생사윤회(生死輪廻)와 생로병사(生老病死)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숭고한 것만이 진리는 아니다. 한 제자가 집안일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투덜대자 퇴계 이황은 “학문의 근본은 바로 일상생활에 있다”며 일상의 공부가 모든 공부의 근본임을 깨우쳐줬다. 그 공부의 목적은 성리학의 진리를 깨달아 도덕적 인격자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더 익숙한 진리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진리인 자연 법칙이다. 자연 법칙을 알아냄으로써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고 자연을 이용하며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 과학의 역사였다.
▼"내가 아는것만이…" 안통해▼
▽칼과 펜과 과학〓19세기 말 조선의 진리를 지키려 했던 선비 유인석은 “자기 멋대로 생각하지 말고 스승을 믿고 따르라”고 역설하며 ‘자기 멋대로’ 사고하는 이단들과 싸우기 위해 붓 대신 칼을 들고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근대라는 시기는 진리에 대한 도전의 시대였다. 이 무렵 독일의 니체는 칼보다 무섭다는 펜을 들었다. 사람들은 사회의 존립을 위해 이른바 ‘진리’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온갖 거짓말로 이를 비호해 왔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종교적 교리로써의 진리나 사회의 전통으로 옹호되던 진리는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 데다 자연과학의 도전까지 받아 그 위상이 점점 더 격하됐다.
이제 미셸 푸코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을 분석하고 해체한다. 윤리의식, 도덕률, 사회적 합의에 기초했다는 법률과 제도. 그 어느 것도 기득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진리의 행방〓내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이제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다. 두 번째 밀레니엄을 마감하며 사람들이 깨달은 점은 적어도 배타적인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 고려시대의 불교, 조선시대의 주자학. 진리의 기본요건이 ‘일반성’임에도 한 때의 권력을 무기로 그 사회의 편견을 진리로 강요했던 것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자 그 편협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는 교통 통신의 발달로 각 지역과 시대의 ‘자칭’ 진리들이 서로 뒤섞이며 수시로 비교된다.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지금, ‘진리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나 만인이 우러러 보는 저 높은 곳에서 진리가 인간을 감시했던 옛 시절과 달리 이제 시대의 증인으로 역사 앞에 선 인간이 진리를 감시한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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