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이창후/'블루 패션'으로 살기

  • 입력 1999년 11월 30일 19시 09분


이창후씨<30·서울대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나는 파란색 옷만 입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파깨비’라 부른다. 파란 도깨비. 이젠 웬만한 초상집은 파란 옷차림으로 가도 이해해준다. 원래 그런 자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학사장교로 공수부대에서 복무할 동안은 파란옷을 못입었다. 아, 태권도복도 파란색이 아니지. 현재 공인4단. 사람들은 “혹시 파란띠를 매지 않습니까”고 묻지만 그건 태권도에 대한 모독이다.

▼왜?▼

내가 파란옷을 입는데 대해 학교내엔 이상한 풍문이 돈다. 내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물의 색인 파란색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10년전쯤 지리학 개론시간에 풍수지리설을 강의하던 한 교수님이 “우리학교에 파란옷만 입고 다니는 학생이 있다던데 풍수지리설의 관점에서 볼 때 일리가 있다”고 말한데서 유래한 것 같다. 그러나 사실무근이다. 또 내가 청학동에서 살다 와서 그렇다는 설과 어려서부터 부모가 파란옷만 입도록 강요했다는 설에도 시달렸다. 역시 사실과 다르다.

내가 파란옷을 입는 것은 단지 때가 타지 않아서이다. 자취를 하다보니 빨래할 시간이 없다. 사람들은 검은색이나 감색옷이 더 때를 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 새파란색은 정말 묵은 때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학입학 직후 교수님들과의 상견례에서였다. 그땐 새파란색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한 교수님이 “자네 운동하다 왔나?”고 내게 질문했다. 내가 봐도 트레이닝복 같았다. 그래서 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파란 바지를 사 구색을 맞췄다. 그랬더니 검은색 양말과 참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 또 파란 양말과 파란 운동화와 파란 외투를 샀다…. 파란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일하지 않으면 참 맞춰입기가 난감한 것이다.

▼양지와 음지▼

파란옷은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리어커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도 사가지 않아 늘 남아있다. 그래서 싸게 산다. 사람들이 파란색 물건이 생기면 나를 떠올려 갖다주니 경제적이기도 하다. 파란 머플러도 이모할머니가 샀다가 ‘도저히 맞춰입기 어렵다’며 고민하던 중 나를 퍼뜩 떠올려 준 것이다.

난 빨간색 볼펜도 검은색 볼펜도 다 쓰는데 우연히 파란색을 쓰다보면 사람들은 “역시 파란 걸 쓰는군요”하며 파란펜도 무더기로 준다. 혼잡한 지하철역이나 기차역에서 친구들과 약속을 해도 금방 찾으니 또한 편리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나 때문에 철학과 친구들이 피해보는 경우도 있다. 미팅을 나가면 “그 과에 파란색옷만 입는 사람이 있다면서요?”하고 여자들이 화제로 삼으니 소외감이 들만도 하다. 또 한번은 대입면접시험에서 서울대 철학과를 지원한 한 고3생에게 교수님이 “아는 철학자를 한명 대보라”고 물었더니 “파란옷 입는 사람이요”라고 대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수님들껜 송구스런 마음이었다.

▼인생은 게임▼

사실 ‘새파란색’에 무에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철학과 학생인 점을 들어 사람들은 그럴듯한 유언비어들을 양산해 내고 풍문은 또 호들갑스럽게 ‘확대재생산’되는 것이다. 이런 게 세상이 아닐까.

세상은 하나의 ‘장기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주위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한칸씩 또는 몇칸씩 움직이는 졸(卒)이고 포(包)고 차(車)이다. 그래서 인생은 세상과의 게임인 것이고 나는 그 게임을 즐긴다.이런 생각으로 살면 실패와 맞닥뜨려도 ‘왜 난 안될까’보단 ‘아, 이번엔 안됐군’하는 생각이 든다. 태권도는 그런 점에서 ‘나를 지우는’ 효과적인 길이다. 내가 태권도를 생각하며 지은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이란 제목의 시를 들어보라.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하나의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요/부풀어 오르는 가슴/그속의 불길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요/…/다섯손가락이 조용히 긴장하는/손 안의 작은 공간에서/무한히 열리는 삶을 위한 길로 들어서고자 함이니….(이하생략)’

〈정리〓이승재기자〉sjda@donga.com

▼Q&A▼

▽Q(기자)〓파란옷은 몇벌입니까?

▽A(이씨)〓체육복1벌, 점퍼1벌, 티셔츠4벌, 바지1벌, 버버리1벌, 머플러1개, 양말 몇 개입니다.

▽Q〓그걸로 1년을 버팁니까?

▽A〓겨울엔 전부 겹쳐 입습니다.

▽Q〓빨래는요?

▽A〓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번씩. 양말은 이삼일에 한번씩. 항상 청결함을 유지하도록 노력합니다.

▽Q〓속옷도 파랗습니까?

▽A〓노코멘트.

▽Q〓파란옷 때문에 눈에 잘 띠어 강의시간에 교수들로부터 자주 질문받진 않습니까?

▽A〓자고 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습니다.

▽Q〓혹시 파란색에 대한 편집증은 아닙니까?

▽A〓그러면 어떻습니까. 그게 왜 문제죠? 검은옷만 입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전 이 세상과의 게임을 즐길 뿐입니다.

▼'파란 도깨비' 이창후씨는▼

69년 대구 출생. 8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해 12년째 파란옷만 입는 중. ‘블루 사이코’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이씨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빚어낸 음모”라며 불쾌해했다.

초등학생 때 삼국지를 탐독하다 병법 독심술 화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 칼쓰는 법과 중국의 비전(秘傳)무술, 점술과 관상에 능하다. 초등학교때 영어 일어를, 중학교때 프랑스어를, 고등학교때 독일어 중국어를 습득할만큼 외국어에 능하지만 우리말에 간간히 섞어쓰는 것은 싫어한다. 예의범절을 중시하여 욕을 한적이 없다. 이번 취재에 대해서도 이씨는 “지도교수님의 허락 없인 절대 응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주장, 기자는 지도교수의 예외적인 승락을 받아 그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현재 애인 없음. 대학3학년 때 ‘가을에 실려온 동화’(이씨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와 제대 후 ‘비와 함께 내리는 시(詩)’를 사귀며 두번에 걸쳐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울대이므로 강의도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고 판단, 작년 9월부터 자신의 인터넷홈페이지(blue.model.cc 또는 www.pakebi.pe.kr)를 통해 자신이 요약한 서울대 철학과의 각종 강의내용과 대학원입시기출문제 등을 전국 철학도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조회횟수 5만여건.

태권도 이론화를 완성시키고, 철학을 대중화시키며, 정치현상론을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형을 만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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